시작 나쁘지 않은 '탈출', 이선균 환한 미소에 씁쓸함만
[장혜령 기자]
▲ 영화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 스틸 |
ⓒ CJ ENM |
(*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기상 악화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바다 위 공항대교, 100중 연쇄 추돌 사고로 갇힌 사람들은 도망갈 곳이 없어 패닉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극비리에 이송 중이던 '프로젝트 사일런스'의 군사용 실험견 에코 11마리가 풀려나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그곳에는 딸 경민(김수안)의 유학길을 배웅하던 청와대 안보실 행정관 정원(이선균)이 있었다. 그는 유력 차기 대권 주자인 안보실장 정현백(김태우)을 깍듯이 모시는 오른팔이다. 정원은 잔뼈 굵은 업무 스킬에 빠른 상황 판단력으로 사람들을 진정시키며 빠져나갈 방법을 모색한다.
하지만 다리 위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실험견의 위협에 더해 통신 두절로 사람들은 무전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들을 구출하러 온 헬기마저 추락해 유독가스가 퍼져 앞을 뚫고 나가긴 힘든 상황, 다리는 붕괴 직전이라 사람들은 철저히 고립됐다.
▲ 영화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 스틸컷 |
ⓒ CJ ENM |
영화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는 가족, 재난, 스릴이 총집합해 여름에 어울리는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기대하게 했다. 여러 악재가 겹친 상황에서 다양한 인물들의 고군분투를 함께하는 재난 영화의 장르적 재미를 생각하며 관람했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특히 안개 낀 공항대교의 공포감이 상당했다. 영화 <미스트>의 불안과 혼돈이 떠오르며 현장감은 배가 됐다. 공항을 가려면 건너야 하는 바다 위 다리는 익숙한 공간이 주는 편안함을 전복시키는데 성공적이었다. 라이브 방송을 하며 위험천만하게 주행하던 유튜버의 차량 때문에 시작된 사고는 충격 그 자체였다. 안개로 시야가 좁아진 가운데 무엇이 어디서 날아올지 몰라 위험했다. 보이지 않는 공포가 커졌다.
여덟 캐릭터의 사연도 클리셰였지만,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로 받아들였다. 빌런이나 신파 속 캐릭터가 등장해도 이미 면역이 단단히 된 상태라 위화감 없이 지나갔다. 서로 소원했던 부녀라는 설정과 이들의 후반부 팀플레이에 재난 극복과 생존의 키워드가 가미되어가 영화 <부산행>이 떠오르기도 했다. 렉커차 기사 조박을 맡은 주지훈은 반려견 조디와 유쾌한 매력으로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해 주기도 했다.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예수정)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려는 남편(문성근)의 희생, 유리 멘탈의 언니(박희본)와 강철 멘탈의 골프선수 동생(박주현)은 대비되는 캐릭터들의 자매애를 보여주며 극에 활력을 더했다. 비밀리에 신형 무기를 만들다가 실패한 프로젝트의 책임 연구원 양 박사(김희원)는 나사 빠진 불안함으로 긴장감을 높였다.
▲ 영화<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 스틸컷 |
ⓒ CJ ENM |
영화 시작부터 어둡고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살짝 맛본 터라, 영화 <괴물>이 떠올랐고 영화 속 비밀 프로젝트가 흥미를 유발했다. 그러나 생체실험의 주체가 청와대라는 게 밝혀지는 순간 맥이 빠져 버렸다. 실험견 에코의 움직임과 어색한 표정의 시각특수효과는 몰입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었다.
총 11마리의 에코는 집단적, 산발적으로 나타나 사람들에게 위협을 가하지만 정작 무섭게 보이지는 않았다. 살상 무기를 만들려다 실패한 개의 활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다리 위의 공포보다 더 무서운 건 역시 사람이었다. 사건의 실체를 알기 전 안보실장의 지지율을 올리는 데에만 혈안 됐던 캐릭터가 사건을 은닉하는 과정을 보며 소름이 돋기도 했다.
정원은 사고가 벌어지기 전 국민 피랍 구출 작전 회의에서 국민의 목숨보다 정치적 파장을 우위에 둔 인물이었다. 어차피 모두를 구할 수 없다면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는 것. 이성적이고 실질적인 정치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그를 보며 캐릭터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후 정원은 승진을 거듭하며 안보실장 정현백의 신뢰를 받아 탄탄대로를 걸었을 것이다.
이런 정원의 캐릭터가 프로젝트 사일런스의 진실을 안 후 확연히 달라져 당황스러웠다. 윤리적 딜레마 역시 다소 작위적인 데다 캐릭터의 각성 과정도 다소 투박해 캐릭터에 이입하기 힘들었다. 동화책 작가였던 아내와 사별 후 일에 매진하다 소원해진 딸과의 관계를 생사의 갈림길에서 풀어내려 했지만, 이 과정도 매끄럽게 보이지 않았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영화의 진행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캐릭터들은 예상 가능한 범위에서만 소비됐다.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는 여러 가지로 아쉽지만 동시에 아련함도 느껴지는 영화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대자본의 투자와 스타급 배우의 출연, 최고의 제작진이 의기투합한 이름값에 미치지 못한다. 영화를 보며 드는 양가적 감정은 아마 이선균의 유작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선균은 영화의 초반부터 마지막까지 러닝타임 내내 극한 존재감을 채우기에 그를 빼놓고 영화를 설명하기 어렵다. 그가 주연한 첫 재난 영화인데, 오랜 연기 경험으로 쌓아 올린 연기 내공과 아우라가 빛을 발한다.
그가 영화 마지막에 이르러 딸을 보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관객을 향한 작별 인사 같아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의 노년 얼굴을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속상하기도 했지만, 영화라는 매체 안에서 영원히 숨 쉬고 있을 얼굴을 떠올리니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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