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른다
[김잔디 기자]
제52차 군사재판 직권재심 공판안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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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 강서학과 강군학은 형제로 당시 각 34세, 31세였다, 이들은 집으로 들이닥친 토벌대에 함께 잡혀갔고, 형 서학은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실제 처형이 되었는지, 육지 형무소에 수감 된 후에 행방불명되었는지 지금도 알 수 없는 상태다. 그의 동생 군학은 1949년 7월 4일 국방경빕법 위반으로 7년형선고 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행방불명 되었다.
망 강군학의 아들 강00은 법정에서 "제가 어려서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어머니한테 들은 이야기로는 집에 숨어있는 것을 하루 아침에 잡아가 배를 태워서 행방불명 되었다고 알고 있었다. 나중에야 대전형무소에 살아계셨다는 연락만 받았다. 제가 1살 때다"라고 부친과 큰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을 증언했다.
망 문철수는 당시 21세로 제주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1949년 토벌대에 연행되어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15년 형을 받고, 대구형무소 수감되었다. 이후 1950년 1월 부산형무소로 이감되었으나 행방불명되었다. 그의 동생 문00은 "내가 12세에 4·3을 맞았다. 형님은 나중에는 토벌대에 귀순을 했다더라. 그리고 대구형무소로 잡혀갔는데 대구형무소로 있을 때 큰 형님이 부산에 있어 면회를 갔다더라. 형이 부산형무소로 이감된 후에도 큰형님이 면회를 갔다가 왔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터져 면회 갔는데, 교도소에 형이 없었다고 했다. 재심으로 무죄선고를 받게 되어 고맙게 생각한다"라며 발언을 마쳤다.
망 임태권은 당시 23세로 조선대학교 재학생이었다. 방학을 이용해 제주시 건입리에 있는 집에 내려왔다가 1949년 4월경 토벌대에 연행되었다. 그는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15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1950년 10월 3일 마산형무소로 이감되었고, 1951년 7월 8일 옥사했다. 그의 조카 임00은 "길게 얘기할 건 없다. 길게 얘기하고 싶어도. 아직까지 4·3사건은 진행 중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정부나 여기 나와 있는 법조인들도 많은 노력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 여기 계신 유족분들이 정신적으로 앞으로 더 충분하게 보상받을 수 있도록 성의 있고 충분한 노력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라고 밝혔다.
망 김태호는 당시 19세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48년 12월 경찰에 연행되어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징역 7년형 선고받고 인천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행방불명되었다. 그의 조카 김00은 "우리 집안은 조부님,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김태호가 4·3으로 희생되었다. 태어나기 전에 사건이 발생해서 자세한 것은 모른다. 어른들도 거의 다 돌아가셨다. 제주에서 검거가 된 후, 할아버지는 목포형무소, 큰아버지는 대전형무소, 작은아버지는 인천형무소에 수감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연락을 받았고, 그 후에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지금까지 4·3으로 양민들이 많이 희생됐는데, 지금이라도 국가 차원에서 이렇게 다시 심판해주고, 희생자를 기리는 것에 힘써주는 것에 감사하게 생각한다"라고 심정을 밝혔다.
망 김상호는 당시 21세로 농업에 종사하던 중 1948년경 토벌대에 연행되었다. 이후 내란죄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고,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50년 7월 27일 군경에 인도되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아들 김00은 "이제 내 나이 78세다. 내가 3세에 아버지가 목포형무소로 갔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다. 제가 3대 독자가 되었다. 제 주변에 아는 사람도 주변에 없었다. 내가 공무원 생활도 했는데. 공무원을 한다고 하니 참 어려움이 많았다. 연좌제라는 굴레가 씌어 있어서 지금까지도 멍에로 지고 살아왔다. 그동안 상당한 어려움과 괴로움을 맛보고 살았으나, 이제라도 좋은 시기에 이렇게 좋은 재판장을 비롯해 힘써준 덕분에 이런 시간을 가지게 되어 고맙게 생각한다."라며 소감을 밝혔다.
이미 망인이 된 4·3 수형인 희생자 대부분은 유해도 찾지 못한 행방불명 상태다. 제대로 된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고 범죄자가 된 것도 억울한 일이지만, 대부분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를 상태로 세월을 계속 보내야 하는 유족들의 슬픔은 감히 짐작도 할수 없다.
매번 재판을 방청하면서 더 마음이 아픈 것은 무죄판결을 받는 30명의 망인을 대신해 어렵게 법정을 찾은 많은 유족이 판사의 적극적인 권유에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증언을 피한다는 것이다. 75년이 넘는 세월 마음에 담아온 아픔을 그 짧은 순간 다 뱉어낼 수도 없겠지만, 행여 무슨 말을 했다가 75년 전과 같은 피해를 볼 것이 두려워 마이크를 들지 못하는 것은 아닐지, 늘 유족들의 표정과 몸짓을 살피게 된다.
이제 좋은 시절이 왔다고는 하나, 지난 70여 년의 침묵과 트라우마는 '죄가 없다.' 판결받는 재판정에서도 여전히 공고한 힘을 가진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어느 유족이 증언했던 것처럼 4·3은 70년이 지나도 현재 진행형이며, 그러므로 다시는, 다시는 이 같은 역사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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