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누구보다 강한 것들
작은 공연장들… 우직하게
지킨 가치를 다시 생각한다
7월의 어느 날, 무려 20년 만에 무대에 선 한 밴드의 공연을 봤다. 밴드 이름은 잠(Zzzaam). 2004년 3집 ‘거울 놀이’를 끝으로 한국 인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이름이었다. 콘텐츠 유행 주기가 몇 달은커녕 몇 주도 되지 않는다는 얘기가 대세인 요즘을 생각하면 화석이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고 해도 좋을 이들의 공연은 사흘 만에 매진됐다. 꽉 채우면 100여명 남짓한 작은 클럽 공연이라도 놀라운 일이었다. 밴드와 함께 화석이 됐던 옛 팬들의 대동단결로 생각한 추측도 틀렸다. 공연장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이에서 이제 막 스무 살이 넘은 청춘까지 다양한 관객이 자리했다. 밴드는 앙코르 곡을 연주하기 직전 자신들을 잊지 않은 오랜 팬과 ‘우리가 활동할 때 아직 태어나지 않았던 분들’에 대한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공연이 열린 장소는 ‘클럽 빵’이었다. 홍대에 위치한, 1994년부터 30년 동안 한국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둥지 역할을 우직하게 해 온 곳이다. 사실 밴드 잠의 20년 만의 무대도 클럽 빵의 3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처음 이대 후문 앞에 문을 열었다가 2004년 홍대에 위치한 지금 자리로 옮긴 지도 벌써 20년이 됐다. 운영 초반에는 음악을 비롯해 연극, 영화, 무용 등 90년대 움트기 시작한 한국의 비주류, 언더그라운드를 대표하는 다양한 문화적 움직임을 담던 이곳은 홍대로 이전한 뒤로는 독립 음악가들의 정신적 지주와도 같은 공간이 됐다. 특히 인디 하면 쉽게 떠오르는 밴드 음악뿐만이 아닌 포크를 중심으로 한 싱어송라이터들에게도 문을 활짝 열었다. 클럽 빵을 두고 ‘여전하다’는 말에 담긴 모든 함의를 합해도 그곳에 여전히 빵이 있다는 말의 무게를 이기지는 못했다.
이야기하다 보니 공간 하나가 더 떠오른다. 상수역 인근 ‘제비다방’이다. 낮에는 커피를 파는 ‘제비다방’으로, 밤에는 바를 겸하는 ‘취한제비’로 모습을 바꾸는 이곳 역시 인디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무척 오래된 아지트다. 천장이 오픈된 지하 공간에서 1년 365일 쉬지 않고 진행되는 공연 라인업은 다채롭다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폭과 깊이를 자랑한다. 정해진 입장료 없이 ‘무료입장, 유료퇴장’이라는, 공연을 찾는 이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남다른 운영 방식을 고수하는 점도 이색적이다. 50여명만 입장해도 관객으로 가득 차는 그곳에서, 인류애와 음악으로 다진 12년이 쌓였다.
역시 7월, 제비다방 규모를 생각하면 감당하기 어려운 크기가 된 두 음악가가 이곳을 찾았다. 7일에는 서바이벌 프로그램 출신으로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싱어송라이터 이승윤이, 16일에는 데뷔부터 지금까지 ‘대체 불가능’이라는 수식어 이외의 말을 찾기 힘든 장기하가 무대에 올랐다. 게릴라 형식으로 공지된 공연은 순식간에 몰린 사람들로 금세 입장 제한이 걸렸다. 수천, 수만명의 관객 앞에서 공연하는 게 더 익숙할 이들은 관객 얼굴이 코앞에 있는 이곳에서 음악과 이야기로 오랜 소회를 나눴다. 제비다방은 이곳에 남은 이들만이 아닌, 이제는 이곳을 떠난 이들의 추억과 흔적을 고스란히 끌어안은 곳이었다.
공연을 보며 여러 생각에 잠겼다. 클럽 빵과 제비다방에 얽힌 개인적인 추억과 오랜 인연을 잊지 않은 이들을 떠올렸다. 책임감이든 관성이든 아니면 그저 그럴 수 있기 때문이든 수십년 같은 자리에서 할 일을 묵묵히 해내는 공간과 아침마다 그곳의 문을 여는 사람을 생각했다. 세상의 속도가 너무 빨라졌다는 핑계와 잠깐 멈추는 순간 도태되고 말 거라는 근거 없는 불안에 현혹돼 번번이 외면하고 지나친, 한때 목숨 같았던 가치들을 기억했다. 세상은 확실히 빠르다. 가끔은 눈이 빙글빙글 돌아 현기증이 날 정도다. 유행에 앞서간다는 말이 거대한 칭찬인 세계관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서 잠시 숨을 멈추고 그런 것들을 생각했다.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엮어주고 있는, 누구보다 강한 것들을.
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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