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사회적 웰빙’ 총체적 위기, 극복할 수 있는가
과학 지식도 세월 따라 변한다. 최근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페닐에프린(PE)이 든 일반의약품 판매를 어찌할 것인지 검토하고 있다. 지난해 9월 FDA 자문위원회가 16명 만장일치로 코막힘을 해소한다는 PE가 먹는 약 형태로는 “플라시보(placebo)보다 나을 게 없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해당 약품은 250종으로 2022년 미국에서만 18억 달러어치가 팔렸다. 최종 결정까지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는데, FDA 결정은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플라시보’란 무엇인가. 라틴어로 “내가 기쁘게 할 것이다”란 뜻인데, 설탕약이나 식염수 주사 등 가짜 약이나 처치, 심지어 가짜 수술로 희한하게 치유 효과를 보는 현상이다. 위의 보도가 나온 뒤, 하버드의대 테드 캡척(T Kaptchuk) 교수는 “연구 결과 플라시보가 음지에서 벗어나 의료 서비스의 합법적 요소가 될 수 있고, 가장 강력한 플라시보는 용기를 주고 자상하게 배려하는 환자-의사 관계이며, 의학은 약제와 시술뿐 아니라 책임 있는 참여의 인간 드라마”라는 요지의 에세이를 썼다(‘No Better Than a Placebo’, 뉴욕타임스 202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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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 역사의 플라시보 미스터리
신경과학적 연구로 풀리기 시작
신뢰·공감의 사회적 플라시보로
정치·사회 스트레스 극복했으면
」
1955년 하버드의대 헨리 비처(H Beecher) 교수의 논문(‘The Powerful Placebo’)에서 플라시보는 정량적 연구로 전환된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부상병 치료에서 모르핀이 떨어지자 생리식염수를 써서 진통 효과를 확인한 마취과 의사였다. 1962년 FDA는 신약의 임상시험에 플라시보를 사용하는 무작위 대조시험(RCT)을 채택한다. 참가자도 조사자도 어느 쪽이 플라시보인지 모르게 하고 플라시보보다 통계적으로 유의미하면 효능이 인정된다.
1961년에는 플라시보와 반대인 노시보(Nocebo)가 등장한다. “나는 해를 입을 것이다”란 뜻인데, 약효에 대한 의심과 부작용 우려로 역효과가 나는 현상이다. 코로나19 백신 접종에 대한 노시보 연구(캡척 교수팀, JAMA Network Open, 2022.1.18.)는 1차 접종 후의 두통·피로감 등 가벼운 부작용의 76%가 노시보이고, 2차 접종 후의 경증 부작용의 52%도 노시보라고 분석했다.
플라시보는 논란도 많고, 우선 가짜를 진짜로 속인다는 비윤리성이 이슈가 된다. 그래서 가짜라고 공개하는 ‘오픈 라벨’ 플라시보가 출현한다. 놀랍게도 2010년 과민성대장증후군(IBS, 캡척 교수팀)과 알레르기성 비염(베를린의대 M 셰이퍼 교수팀)의 연구에서는 가짜라고 알렸음에도 플라시보 효과가 나타난다. 약 복용으로 자기치유가 가능하리라 기대하고, 좋은 치료라는 신뢰와 긍정 때문으로 풀이된다.
1970년대 말부터 플라시보 미스터리는 신경과학 연구로 풀리기 시작한다. 치과 환자의 엔도르핀 분비를 막으니 플라시보 효과가 사라진 것이다. 1990년대 두뇌 스캔 기술은 플라시보가 엔도르핀 분비를 촉진한다는 사실을 밝혀준다. 플라시보가 파킨슨 환자의 도파민 분비를 촉진하고, 우울증 환자의 뇌에서 전기적·대사적 활동을 촉진한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MRI와 뉴로이미징 기법으로 플라시보가 뇌의 시상부·기저핵·감각피질의 통증 조절에 관여하며, 동기 부여를 변화시킨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플라시보 반응은 엔도르핀·도파민·칸나비노이드·세로토닌·옥시토신 등 신경전달물질 분비에 의해 기대와 심리에 관한 두뇌 활동이 변화하는 신경과학적 현상이다. 2015년 뇌의 기능성 자기공명영상(fMRI) 연구에서는 플라시보 효과의 정도 차이가 유전자 변이에 기인한다는 결과를 얻었다. 통증·우울증·불면증·편두통·ADHD·IBS·천식·파킨슨병 등을 다룬 플라시보 연구결과는 놀랍다. 그러나 단기적이고 제한적이므로 암이나 중증 질환에서는 경계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세계보건기구는 건강을 신체적·정신적·사회적 웰빙 상태로 정의한다. 최근 플라시보 연구는 신체적·정신적 효과에서 나아가 사회적 웰빙까지 확장되고 있다. 플라시보 요법으로 타인에 대한 신뢰와 친밀한 관계, 긍정과 공감의 사회적 웰빙을 높인다고 보고 있다(PNAS 2018.5.14). 사회적 플라시보 효과(SPE)는 사회적 인지 기능에 중요한 옥시토신을 코에 분사하는 비강 투여와 비슷하지만, 동기(動機) 상태에 더 민감한 것으로 나타났고, 사회적 기능 장애 치료에 도움이 될 것이란 전망이다.
기후위기로 악화되는 폭염과 재난으로 신체적으로 괴롭고, 정치적·사회적 난장(亂場)으로 정신적 웰빙의 한계를 시험받는 나날이다. 사회적 웰빙이 위기에 처해 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럴 수는 없다. 정부는 7월부터 ‘전국민마음투자지원사업’을 시작해 2027년까지 100만 명에게 심리상담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한다. 자살방지 등의 효과를 기대한다. 그러나 ‘가족이 제 기능을 못 하고 학교는 정글로 불리는 상황’(중앙SUNDAY 2024.7.13-14)이고 보니, 광범위하고 근원적인 사회적 플라시보 운동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김명자 KAIST 이사장·전 환경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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