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금메달 양정모 고언 "레슬링을 놀이처럼, 일본 최강국 됐다" [이지영의 직격인터뷰]

이지영 2024. 7. 19.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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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첫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양정모

부산 북항에서 만난 양정모씨. 레슬링 기본 자세를 취하자 선수 시절 형형한 눈빛이 그대로 살아났다. 파리올림픽 출전 선수들을 향한 응원의 뜻에서 엄지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송봉근 기자

2024파리올림픽이 오는 26일 개막한다. 지구촌 최대 스포츠 축제가 1주일 앞이지만, 올림픽 열기는 예전 같지 않다. 금메달 5개, 종합순위 15위. 대한체육회가 내놓은 목표 수치를 두고 실망과 걱정의 분위기가 역력하다. 여자핸드볼을 제외한 모든 단체 구기 종목이 본선 진출에 실패하는 바람에 선수단도 단출해졌다. 22개 종목 144명.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최소 규모다. 하계·동계 올림픽 모두 ‘톱10’에 들었던 스포츠 강국의 위상은 신기루처럼 사라진 걸까.

우리나라 첫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양정모(71)씨를 지난 16일 그의 고향 부산에서 만났다. 48년 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레슬링으로 우승대에 올랐던 그는 “내가 올림픽에 출전했을 때는 금메달이 하나도 없었을 때니까 금메달에 집착했지만 이젠 많이 따지 않았냐”면서 “우리 국민도 꼭 좋은 성적만 기대할 게 아니고 선수들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하는 마음으로 응원해주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 1976년 올림픽 앞두고 걱정했지만
비디오 영상 분석으로 상대 제압

환영 카퍼레이드에 100만 인파
한체대 개교도 첫 금메달이 계기

엘리트·생활 체육 공존 바람직
일본 레슬링처럼 저변 확대해야

이지영 논설위원


대한민국 들썩이게 한 금메달 소식

Q : 1976년 올림픽을 앞두고 어떤 심정이었는지 기억 나나.
A : “내가 과연 오이도프를 이기고 금메달을 딸 수 있을까 걱정이 많이 됐다. 당시 레슬링 세계챔피언인 오이도프와는 세 번째 만남이었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선 내가 이겼고, 75년 민스크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졌다. 선수촌에서 오전 6시 기상 음악을 듣고 일어날 때마다 ‘이긴다는 보장도 없는데…’ 하는 걱정부터 했다.”
그 부담을 딛고 그는 그해 8월 1일 우리 국민의 숙원이었던 올림픽 금메달을 땄다. 몽골의 오이도프, 미국의 진 데이비스와 함께 벌인 레슬링 자유형 페더급(62㎏) 결승리그에서 최고 점수를 얻어 우승했다. 데이비스를 폴승으로 제압했고, 마지막 승부인 오이도프와의 경기에선 8대 10으로 판정패했지만, 벌점 계산에서 앞서 금메달을 차지한 것이다. 1948년 런던올림픽 참가 이후 28년 만에 이룬 역사였고,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금메달을 걸었던 손기정 선생의 한을 날린 쾌거였다.

Q : 우승 비결이 있었나.
A : “미국 선수 데이비스 덕을 본 셈이다. 당시 건설업을 했던 레슬링협회 김시중 부회장이 협회에 소니 비디오카메라를 기증했는데, 협회에서 그 카메라를 올림픽에 가져가 경기 장면을 다 찍었다. 영상을 분석해보니 데이비스가 ‘넬슨(상대방의 뒤에서 겨드랑이 사이로 팔을 넣어 목을 찍어누르는 기술)’을 주특기로 구사하고 있었다. 오이도프도 그 기술에 넘어가 졌다. 넬슨을 막는 건 간단하다. 겨드랑이에 손이 들어와도 머리를 딱 살리고 있으면 안 돌아간다. 나는 그걸 알고 경기에 나갔으니 데이비스 기술이 안 통한 거다.”
그의 금메달 소식은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했다. 신문들은 호외를 찍어 낭보를 알렸고, 김포공항부터 서울시청까지 카퍼레이드를 할 때 도로에 늘어선 인파가 100만 명이었다.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환영대회에선 1000마리 비둘기까지 날리며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환영 리셉션은 경복궁 경회루에서 열렸다. 가수 김상희가 부른 가요 ‘몬트리올의 금메달’도 그 해 나왔다. ‘온누리 이겨낸 양정모 선수여 그대의 기상은 대한의 기상…’으로 이어지는 노래 가사는 국민영웅으로 떠오른 그의 위상을 짐작케 한다. 체육연금, 체육인 병역특례, 체육훈장 청룡장 등도 모두 그가 ‘1호’로 받았다.

한국체육대학도 그의 금메달이 계기가 돼 설립됐다. 정동구 대표팀 코치와 함께 박정희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대통령이 금메달리스트를 계속 양성할 수 있는 방안을 물었다. 정 코치가 국립체육대학의 필요성을 이야기하자 박 대통령은 그 즉시 결정을 내렸다. 이듬해인 1977년 3월 한체대는 ‘국위 선양을 위한 우수선수 양성’을 설립 목적으로 내세우며 개교했다. 그는 “외국 선수들과의 교류, 지도자 양성 등에 한체대의 역할이 컸다. 한국체육의 새로운 도약대가 됐다”고 의미를 짚었다.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역사상 첫 금메달을 따고 시상대에 오른 양정모(가운데) 선수. [중앙포토]

Q : 이후 한국 스포츠가 급성장했다. 레슬링은 1988년 서울 대회부터 1996년 애틀랜타 대회까지 3회 연속 금메달을 두 개씩 따며 황금기를 누렸다.
A : “1982년부터 96년까지 레슬링협회장을 역임한 이건희 회장 얘기를 꼭 하고 싶다. 서울사대부고 다닐 때 레슬링을 했던 이 회장이 투자를 정말 많이 했다. 돈이 있다고 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레슬링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선수들뿐 아니라 지도자들도 격려금으로 사기를 살려줬고, 해외 심판이나 연맹 관계자가 한국에 오면 신라호텔에 묵게 하면서 최고의 대접을 했다. 이후 국제 대회에서 편파 판정으로 불이익 받는 일은 최소한 없어졌다.”


인구 줄고 힘든 운동 기피

Q : 지난 2020도쿄올림픽에서 레슬링이 노메달에 머물러 충격이 컸다. 이번에도 그레코로만형 130㎏급 이승찬과 97㎏급 김승준 등 두 명밖에 출전을 못 한다.
A : “선수층이 너무 얇은 것이 대한레슬링협회의 큰 숙제다. 저출산으로 인구가 주는 데다 힘든 운동을 점점 안 하려고 한다. 다들 돈 많이 버는 야구·축구·골프로 간다. 레슬링도 실업팀이 있지만, 프로팀이 있는 스포츠들과 받는 돈이 비교가 안 된다. 레슬링은 우리나라 스포츠 역사에서 가장 먼저 세계 정상에 올라간 종목이다. 장창선 선배가 1966년 톨레도 세계 레슬링선수권대회에서 딴 금메달이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선수권 금메달이었다. 힘든 여건에서 이룬 신화들이 많이 퇴색되는 것 같아 아쉽다.”
그는 선수 저변 확대의 모범사례로 일본의 여자 레슬링 육성책을 들었다.

“일본은 1987년 세계선수권대회에 여자레슬링 종목이 들어가자 곧 올림픽에도 도입될 것으로 내다보고 그때부터 여자레슬링에 투자했다. 1964년 도쿄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우에다케 요지로가 여덟, 아홉 살 소녀들을 대상으로 레크리에이션 가르치듯 레슬링을 지도했다. 힘든 운동이 아니라 재미있는 놀이처럼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2004년부터 올림픽 종목이 된 여자레슬링에서 현재 일본이 최강국이다. 올림픽 4연패 기록을 세운 이초 가오리는 라면 광고 모델로 나올 만큼 큰 인기를 누린다. 레슬링협회에서 조직적으로 기획해서 일본의 육성 시스템을 배워와야 한다.”

Q : 엘리트 체육의 시대는 끝났다는 주장도 있다.
A : “엘리트 체육은 여전히 필요하고, 계속 육성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올림픽은 모든 사람이 환호하고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기회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같은 선수 육성 시스템이 있어야 가능하다. 엘리트 체육과 생활체육, 장애인 체육은 공존해야 한다. 이거냐, 저거냐 선택할 일이 아니다.”


병역특례 폐지 안 될 것도 없어

Q : 올림픽·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들에 대한 병역 특례도 종종 폐지 여론에 휩싸인다.
A :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스파르타식 훈련도 안 통하는 시대다. 병역 문제도 시대 변화에 맞게 국가 차원에서 정부가 결정하면 된다. 복무 기간도 많이 줄었고, 훈련을 이어갈 수 있는 상무팀도 있으니 절대 폐지하면 안 될 일이라고 할 것도 없다.”
그의 현역 선수 생활은 1980년 마무리됐다. 모스크바올림픽까지 2연패를 노리고 훈련에 매진했지만, 그에게 더이상의 올림픽 무대는 없었다. 당시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 국가들이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해 불참을 결정했고, 우리나라도 그중 하나였다. 선수 생활을 끝낸 지 40여 년이 지났지만 그는 “지금도 레슬러로서는 은퇴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요즘도 모교인 동아대 레슬링팀과 부산 아시아드 주 경기장 안에 있는 ‘양정모 올림픽 금메달 획득기념 종합실내훈련장’에 들러 후배들을 격려하고 지도한다. “얼마 전 경북 상주에서 열린 ‘양정모올림픽제패기념 제49회 KBS배 전국레슬링대회'에 가보니 다문화가정 어린이들이 많이 있더라”면서 “그 아이들 레슬링 훈련에도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매주 두세 차례씩 병원에 들러 물리치료를 받는 것도 그의 주요 일과다. 그가 숙명처럼 감당하는 레슬링의 후유증이다. 특히 뒤로 누운 채 머리와 다리로 몸을 지탱하고 상체를 들어 올려 상대 공격을 막는 ‘브리지’ 자세를 오래 한 탓에 허리와 목의 통증이 심하다.

Q : 일생을 레슬러로 살게 된 원동력은 무엇인가.
A : “처음 레슬링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하다가 그만두려거든 처음부터 하지 말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일제시대에 유도 선수를 하셔서 운동이 힘들다는 걸 알고 계셨다. 아버지의 그 말씀이 나를 끝까지 하게 했다. 처음부터 안 했으면 모를까 중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Q : 이번 올림픽 출전 선수들에게 선배 메달리스트로서의 조언을 한다면.
A : “모든 것을 다 걸어야 자기가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생각도 중요하다. 훈련을 하지 않는 시간에도 이렇게 해볼까, 저렇게 해볼까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면 경기에 큰 도움이 된다. 스포츠의 특징 중 하나는 의외성이다. 객관적 전력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희망을 잃지 마라.”
◇양정모=1953년 부산 출생. 중학교 2학년 때 부산 동광동 ‘한일체육관’에서 레슬링에 입문했고, 부산 건국고·동아대를 졸업했다. 태극마크는 1971년 도쿄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 때 처음 달았다. 아시안게임에선 1974년 테헤란 대회와 78년 방콕 대회에서 연이어 금메달을 땄다. 1980년 현역 선수 생활을 접은 뒤 한국조폐공사 레슬링팀 감독, 레슬링협회 런던올림픽 특별대책위원장 등을 지냈다. 취미는 사진 찍기. 두 차례 사진 전시회도 열었다. 10여 년 전 서울에서 낙향한 뒤로 그가 주로 찍는 피사체는 바다와 갈매기·왜가리·가마우지 등이다.

이지영 논설위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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