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빌리의 노래’와 ‘개천 용’의 꿈 [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2024. 7. 19.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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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 중앙SUNDAY 문화전문기자

너무나 영화 같은 장면이나 스토리가 실화일 때 사람들은 특히 큰 충격이나 감동을 받는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3일 죽음의 문턱에서도 영화 같은 멋진 사진이 나올 만한 제스처를 취해 ‘궁극의 쇼맨’임을 증명했다. 그가 지난 15일 러닝메이트로서 불과 39세의 젊은 오하이오 연방 상원의원 J D 밴스를 지명한 데에도 여러 정치적 고려 외에 밴스의 영화 같은 삶이 한몫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의 삶을 다룬 영화 ‘힐빌리의 노래’(2020년)가 나오기까지 했는데,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그의 동명 회고록(2016년)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 공화 부통령 후보 ‘흙수저’ 밴스
미 중부 저소득 백인 문제 통찰
존재 자체가 강력한 우파 비전
한국 여당은 흙수저에 꿈 주나

트럼프 러닝메이트 된 밴스 상원의원

영화 ‘힐빌리의 노래’ 에서 JD밴스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 오언 아즈탈로스와 할머니를 연기한 글렌 클로스. [사진 넷플릭스]

밴스는 ‘금수저’ 트럼프와 달리 ‘흙수저’이고 ‘힐빌리(애팔래치아 산악지대 촌놈)’이다. 그래서 ‘개천에서 나온 용’의 아이콘이다. “일자리와 희망이 급격히 사라져가는” 러스트벨트(몰락한 공업지대)에서 나고 자랐다. 아빠는 그가 어릴 때 떠난 지 오래고 엄마는 약물 중독이었다. 집안은 물론 주변에도 대학 나온 사람이 거의 없었다. 동네에서 연간 수십 명이 헤로인 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런 환경에서 소년 밴스도 막 나갈 뻔했다. 그를 잡아준 이는 그가 ‘마모(Mamaw)’라고 부른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나쁜 친구들과 계속 어울리면 그 친구들을 차로 밀어버리겠다”고 할 만큼 터프했으며 “가족이랑 주말을 보낼 수 있는 직장에 취직하려면 대학에 가야 한다” 같은 쉽고 구체적인 말로 밴스의 공부 의욕을 북돋웠다. 엄마를 떠나 할머니와 살면서 안정감과 성취욕을 얻었다. 그 후 해병대에 복무하며 삶의 상식과 재테크 방법을 배웠다. 마침내 그는 명문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거기서 만난 인도계 여자친구 변호사와 결혼했다.

이러한 과정을 기록한 밴스의 책 『힐빌리의 노래』는 미국은 물론 세계 각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첫째는 그의 글 쓰는 스타일 덕분일 것이다. 파란만장한 어린 시절을 자기연민이나 울분에 차서 신파극으로 묘사하지 않고, ‘너도 노오력을 해라’라고 설교하지 않는다. 자신과 주변 힐빌리들의 삶을 그저 솔직하고 덤덤하게 펼쳐 놓는데, 그래서 웃픈 감정을 자아내는 문학적 희비극이자 생생하고 신뢰할 만한 지역 사회 보고서로 여겨진다.

둘째는 그가 자신과 이웃의 삶을 더 넓은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고찰하며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한 통찰을 곁들였다는 것이다. 밴스는 일단 “제조업의 몰락”이 원인이지만 “나쁜 상황에 최악의 방식으로 반응하는 사람들”도 문제이며 “사회적 부패를 조장하는 문화”도 문제라고 본다. 예를 들면 친구 하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싫다고 직장을 때려치우더니 얼마 후 “(당시 대통령이던) 오바마 경제정책 탓에 자기 인생이 이 모양이다”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더란다. 또 주변에 일은 안 하고 갖가지 복지 혜택만 쏙쏙 빼먹는 소위 ‘복지 여왕’들을 여럿 보았는데 그들은 인종적 편견과 달리 모두 백인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동조하는 무기력한 동네 분위기, 존경할 롤모델 없는 가족 등이 빈곤의 악순환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트럼프의 정치적·인종적 편 가르기와는 거리가 먼 동시에 본질적으로 우파적인 것이다. ‘문제는 사회 탓이며 정부 정책을 통해 바꿔야 한다’는 것이 좌파적 입장이라면 ‘정부 정책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각성과 노력으로 상황을 일단 돌파할 필요가 있으며 여기에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가족과 문화가 중요하다’는 것은 우파적 견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마이크로소프트 창립자 빌 게이츠는 “가난의 원인이 되는 문화의 다면적 성격과 가족의 중요성에 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됐다”고 호평했다. 뉴욕타임스 역시 “트럼프의 등장을 이끈 백인 하층민에 대한 연민이 담겨있고, 통찰력 있는 사회학적 분석을 민주당과 공화당 지지자들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어휘로 제공한다”고 찬사를 던졌다.

트럼프 공격수에서 강성 지지자로 변신

미국 공화당 부통령 후보 JD밴스. [AP=연합뉴스]

책을 쓸 당시에 밴스는 트럼프의 선동적인 갈라치기 수사를 공적으로 비난했고 사석에서 “미국의 히틀러”라고 부를 만큼 우려했다. 그러던 그가 트럼프 재임 동안 우호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는데, 트럼프가 ‘자신이 잘 몰랐던 정치의 부패함에 균열을 내는 인물’이며 ‘자신이 염려하는 사람들(백인 서민)에게 그나마 와 닿을 수 있는 사람’임을 알게 됐기 때문이라고 강변했다.

밴스는 흙수저로서 공화당의 상류 엘리트 카르텔을 깰 현실적인 방법으로 트럼프를 택했는지 모른다. 또는 여러 학자가 지적한 현실, 즉 ‘좌·우파 정치인들이 강남좌파와 강남우파 같은 엘리트집단만 대변하고 계층 상승 사다리를 걷어차며 서민은 아무도 대변하지 않는 현실’에 염증을 느낀 것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2022년 상원의원 출마를 기점으로 그는 이제 ‘트럼프의 클론’이라 불릴 정도로 강성 트럼프 지지자가 됐다.

이러한 밴스의 변신에 실망할 사람도, 지지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트럼프 입장에서 밴스의 부통령 후보 지명은 영리했다. ‘개천 용을 꿈꿀 수 있고 개천 용이 많은 사회’야말로 우파가 내세울 점이다. 밴스는 개천 용 그 자체이며 많은 이들에게 ‘꿈’을 줄 수 있는 인물이다. 트럼프는 밴스 지명으로 백 마디 말을 강렬하게 대체한 셈이다.

비전 사라진 한국 여당
그런데 지금 한국의 우파 정당인 여당의 전당대회 상황은 어떤가? 진흙탕 폭로전만 난무하고 우파 정당으로서의 비전 발표는 찾기 어렵다.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정부가 비교적 높은 지지율에도 정권 교체를 당한 것은 부동산 가격 폭등이 ‘차근차근 내 집을 마련해 계층 사다리를 밟아 올라가겠다’라는 꿈을 박살 냈고, 여기에 조국 조국혁신당 의원의 자녀 입시 비리가 그의 소위 ‘가붕개 발언’(모두 용이 될 필요가 없으며 개천에서 가재·붕어·개구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과 맞물려 ‘자기 자식은 용 되고 다른 사람은 가붕개로 남으라는 것인가’의 분노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당은 정권 교체 뒤 우리 사회의 무너져가는 사다리를 다시 세우기 위한 비전과 꿈을 보여줬는가. 지금 여당의 대야 투쟁은 야당의 운동권 귀족과 노조 귀족이 득세하는 꼴을 못 봐주겠다는 기존 귀족의 몸부림으로 비칠 뿐이다.

여당 총선 과정에 참여했던 한 변호사는 신랄하게 말했다. “정당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방향과 가치를 제시하고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국민 눈높이’를 따라가겠다고 외칠 게 아니라 국민이 마음을 줄 수 있는 비전을 먼저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여당은 총선 때 그렇게 하지 못했고, 지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문소영 중앙SUNDAY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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