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백의 아트다이어리] 미술은 선악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가?
납량특집은 아니더라도, 더위를 식힌답시고 범죄 다큐멘터리를 몇 편 보게 되었다. 인간이 얼마나 사악할 수 있는가와 함께 한 가지 더 알게 된 것이 있다. 악명높은 연쇄살인마일수록 카리스마 강한 매력과 함께 연민에 호소하는 ‘관계형’ 인간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런 악인들일수록 스스로를 교묘하게 은폐하며 희생자들의 눈을 멀게 한다. 시청자로서는 ‘어떻게 인간이 그렇게까지 사악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과 함께, 악인의 성장 배경을 추적하며 ‘도대체 왜?’에 대한 심리적 근거를 쫓게 된다. 하지만 이유를 알고 싶은 궁금증은 종종 ‘이해 불가’에 부닥친다. 인간 심리의 속내가 간단치 않고 또 선에서 악으로 돌변하는 상황에 작용하는 요소들이 너무도 복합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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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망과 금기 사이의 실험미술
인간 내면의 선악 경계에 질문
관람자가 윤리 문제 떠안기도
」
미술작업은 왕왕 의식과 무의식의 차원을 넘나들며 욕망과 사회적 금기 사이의 경계를 실험하기도 한다. 선악의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의 자율성은 20세기 중반까지의 모더니즘뿐 아니라 신실재론과 같은 최근의 철학에서도 담보된다. 그러다 보니 왕왕 작가의 미적 탐색과 상상력은 윤리적 허용 범위를 벗어나 질주하곤 한다. 하지만 무한 담보되는 것 같은 예술가의 표현력과 상상력이 타자를 해하는 악의 영역에 한 발 담그는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세르비아의 행위예술가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ć)는 1974년 ‘리듬 0’(사진)라는 작업에서 자신의 신체를 대중 앞에 과감히 내어놓았다. 이 문제적 퍼포먼스에서 그녀는 전시실 가운데 부동의 자세로 서 있고, 그 앞 탁자에 꿀, 와인, 총, 도끼, 면도날 등 72가지의 도구를 늘어놓았다. 관람자는 안내문에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나는 물체이고, 이 시간 동안 모든 법적 문제는 내가 책임지겠다”라는 문구를 읽을 수 있었다.
다수의 관객 중 용기를 낸 몇이 아브라모비치에게 다가와 그녀를 간지럽히거나 꽃을 가져다주는 등 소극적인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관람자 한 명이 그녀의 뺨을 때렸고 이를 기점으로 관객의 행위는 점차 과격해졌다. 마침내 그녀의 옷은 찢겨나가 알몸이 되어버렸고 각종 성추행을 당하게까지 된다. 급기야 야수로 돌변한 관람자 몇은 그녀의 몸에 면도칼로 상처를 입히고 목에 총을 겨누는 등 생명에 위협을 가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약속한 6시간 동안의 퍼포먼스가 끝나고, 작가는 예술품이 아닌 인간 아브라모비치로 돌아온다. 옷을 차려입은 그녀를 마주하고 민망해진 관객들은 전시장을 속속 빠져나갔다고 한다.
작가는 자신을 오브제로 하여 인간 내면에 숨겨진 잔혹성을 드러내고 싶었다는 퍼포먼스의 의도를 밝혔지만, 6시간은 그녀에게 끔찍한 공포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동시에 그 시간 동안 ‘예술적’ 행위에 동참했다는 합법성 아래서 적지 않은 관객들이 자신의 숨겨진 욕망과 야만적 폭력성을 드러냄으로써 작가의 의도는 일종의 공동 참여 형태로 완성된다. 그리고 이 ‘작품’을 보며 우리는 인간에게 잠재된 악의 상시성과 현장성을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본격적 미술작품은 아니지만, 이러한 윤리적 이슈를 건드리는 대표적 경우가 사진 저널리스트 케빈 카터(Kevin Carter)의 ‘독수리와 어린 소녀’(1993)이다. 퓰리처상 수상작인 이 사진은 수단의 어린아이가 굶주린 독수리 앞에 있는 장면을 카메라 기법으로 예리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수많은 사람이 이 사진을 보며 경악했고 이를 실은 뉴욕타임스는 불티나듯 팔렸다. 인간이 동물의 먹잇감이 된다는 금기를 건드린 일종의 충격적 ‘볼거리’였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대중은 독수리를 바로 내쫓지 않고 사진을 찍은 작가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이 사진 한장으로 인해 세상이 들끓게 되면서 악성 빈곤의 땅에는 각종 지원이 주어지게 된다.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온 작가는 어땠을까. 예술에서 보장되던 그 윤리의 경계 안쪽으로 다시 돌아온 후 그는 자살하고 만다. 사실 그는 사진을 찍은 후 독수리로부터 아이를 구했고, 일반의 예상과 달리 독수리가 아이를 먹는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의 사진은 인간 내면 속 선과 악의 경계를 일상의 현장에서 시험하는 사건의 하나로 회자된다.
현대미술은 창작자인 작가보다 바라보고 느끼는 관람자가 주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면 윤리의 문제 역시 작가보다는 관람자 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예컨대 관람자도 예술 영역으로 들어가는 순간 미술가에게 담보되는 윤리적 자유의 공동부담자가 되는 것이다. 인간 내면의 양과 늑대 중 어느 쪽에 먹이를 줄 것인가는 이제 작가뿐 아니라 관람자도 함께 떠안아야 하는 문제가 되었다.
전영백 홍익대 교수, 미술사·시각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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