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별 통보 11분 만에 흉기 검색, 심신미약이라니” 유족 인터뷰
첫 공판서 “조현병 앓았다”며 심신미약 취지 주장
숨진 여성 언니 단독 인터뷰
“동생 태블릿PC에 접속해 남자친구와의 대화를 전부 살펴봤어요. 조현병이요? 조현병으로 의심할 만한 정황은 하나도 없었어요.”
결별을 통보했다는 이유로 사귄 지 3주 만에 여자친구를 살해한 이른바 ‘하남 교제 살인’ 사건의 첫 공판이 열린 18일. 피해자의 언니인 A씨는 공판 이후 서울 모처에서 진행된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가해자 측의 심신미약 주장을 믿을 수 없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 사건의 유족이 언론을 만나 직접 심경을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수원지방법원 제1형사부(부장판사 허용구)는 살인 혐의로 기소된 B씨(24·남)에 대한 첫 공판을 열었다. 검찰은 B씨가 사전에 흉기를 구입하고, 구체적인 범행 계획까지 세웠다며 “명백한 계획범죄”라고 밝혔다. 이어 “이 사건 경위와 방법, B씨의 성향을 종합할 때 B씨는 살인 범죄를 다시 범할 위험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B씨 법률대리인은 “기본적으로 범행을 인정하는 입장”이라면서도 “B씨가 조현병을 앓았고 지금까지도 치료를 받고 있다”고 심신미약 취지의 주장을 펼쳤다.
A씨는 B씨 측의 이런 반응에 “조현병 주장은 감형을 노린 꼼수”라면서 검찰 수사 내용과 사건 당일의 상황 등을 근거로 정면 반박했다.
검찰 공소장에 따르면 B씨는 지난달 7일 오후 5시42분쯤 경기도 하남에 있는 한 카페에서 여자친구인 피해자(사망 당시 18세)에게 결별 통보를 받았다. 이에 격분한 B씨는 오후 5시53분쯤 휴대전화로 ‘강서구 PC방 살인사건’ 범행 도구를 검색했다. 강서구 PC방 살인사건은 2018년 김성수가 서울 강서구의 한 PC방 아르바이트생을 흉기로 무참히 살해한 사건이다.
B씨는 같은 날 오후 7시2분쯤 흉기 네 자루 등을 산 뒤 하남의 한 아파트인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검찰은 B씨가 자택에서 구체적인 살해 계획을 세웠다고 보고 있다. 이후 오후 10시50분쯤 같은 아파트에 사는 피해자를 주거지 인근으로 불러냈고, 오후 11시4분쯤 피해자가 나오자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11분 뒤인 오후 11시15분쯤 소지하고 있던 흉기로 피해자의 얼굴, 목, 복부, 팔 등을 찔렀다.
B씨는 도주한 지 10여분 만에 목격자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피해자는 곧장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출혈성 쇼크로 끝내 사망했다.
A씨는 사건 당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동생과 마찬가지로 대학생인 A씨는 그날 시험 기간을 맞아 늦은 밤 귀가했다고 한다. 곧장 씻으러 들어가면서 어깨너머로 엄마가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119구급요원의 전화였다. 가족에게 그런 끔찍한 불행이 닥칠 거라고 상상도 못 했던 엄마는 보이스피싱인 줄 알고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그러나 거듭 울리는 전화벨에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고, 아빠와 세 남매의 첫째인 오빠가 먼저 사건 현장으로 달려갔다.
아빠와 오빠는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하는 동생의 모습을 고스란히 목격했다. 씻고 있던 A씨가 사건 현장에 도착했을 땐 가족이 모두 병원으로 떠난 뒤였다. A씨는 동생이 오토바이 사고 같은 것을 당해 크게 다쳤나 싶었다고 했다. A씨는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거기까지였다. 동생이 살해당했을 거라고는 차마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걱정하던 A씨에게 약 1시간 뒤 아빠의 전화가 왔다. “네 동생이 하늘나라로 갔어.” 믿을 수 없는 한마디에 A씨는 그대로 주저앉아 한참 동안 오열했다. 동생을 다시 마주한 건 장례 절차가 진행될 때였다. 염 과정에서 가족들이 모두 동생에게 작별인사를 건넬 때 A씨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상황을 믿을 수 없었고,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피해자와 B씨가 처음 만난 것은 지난 5월 14일쯤이다. A씨가 동생과 B씨의 문자메시지, 카카오톡 메시지 등을 전부 살펴본 결과 두 사람의 첫 만남 장소는 지하철역으로, B씨가 A씨에게 연락처를 물어봤다고 한다. A씨는 “그전까지 동생은 교제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갓 대학생이 된 스무 살이지 않나. 호기심에 연락처를 줬던 것 같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약 일주일만인 5월 20일부터 교제하기 시작했다. B씨는 사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킨쉽을 요구했다. 피해자에게 1박2일로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고, 피해자가 거절하자 노골적으로 성관계를 요구한 대화도 있었다. 피해자는 B씨의 이런 요구가 불편했던지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A씨가 살펴본 친구와의 대화 내용에 따르면 친구는 “네가 많이 안 좋아해서 그런 거 아니야?”라고 말했고, 피해자는 이에 동조하는 반응을 보였다. A씨는 “동생이 그러면서 결별을 결심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성적인 요구를 제외하고는 동생과 B씨와의 대화에서 이상한 점은 없었다고 한다. 전형적인 연인 사이의 대화에 가까웠고, B씨의 태도에 특별히 폭력적이거나 문제의 소지가 있는 모습은 안 보였다. 미리 문제를 예상하고 피할 길이 없었다는 의미다. A씨가 ‘교제 살인’의 처벌 규정이 강화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A씨는 “보통 연인에게 거주지, 신상정보 등을 다 말하게 되지 않나. 그만큼 범죄 위험성에 더 노출되는 것”이라며 “무엇보다 서로 신뢰하고 교제를 시작하는데, 그것도 만난 지 3주 만에 위험을 감지하고 피할 방법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처벌이라도 강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아빠는 요즘 방에만 계세요. 저는 탄원서를 모으느라 정신이 없고요. 엄마는 그 탄원서를 보며 계속 울고 계시고요. 오빠는 집에 잘 안 들어와요. 들어와도 잠만 자고 나가고…. 저도 동생 얘기는 잘 안 꺼내요. 부모님이 힘들어하실까 봐요.”
누구보다 화목하고 대화가 넘쳤던 가족은 이제 침묵 속에서 겨우 일상을 유지하고 있다. A씨는 동생을 목격한 아빠와 오빠의 트라우마가 걱정되지만 두 사람이 심리치료를 받는 것을 지켜보는 것 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괴로워했다. A씨는 “동생이 고등학생 시절 아빠가 매일 출근길에 데려다주고는 했다. 아빠가 이제 그 길을 갈 때마다 얼마나 괴로울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동생이 태어난 뒤 줄곧 한방을 써왔던 A씨는 애써 외면하는 방식으로 고통을 견디고 있다. 사건 직후 자신이 동생에게 줬던 선물 등 일부 물품만 남긴 뒤 동생의 물건을 모두 처분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 수십 장씩 있을 만큼 교우관계가 좋고, 누구보다 착하고, 법조인을 꿈꿨던 동생이 떠난 사실을 그는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다. A씨는 “조현병을 주장하며 감형을 노리는 B씨 때문에 슬퍼할 겨를도 없다. B씨가 엄벌에 처해지는 걸 보기 전에 내가 무너질까 봐 두렵다”며 예외 없는 엄벌이 내려져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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