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되고 싶었던 남자, 궁예를 보는 두 가지 시선
[이준목 기자]
▲ tvN '벌거벗은 한국사' 궁예편 |
ⓒ tvN 스토리 |
궁예(弓裔)는 후삼국 시대의 군웅이자 태봉(泰封)의 창업 군주다. 일개 떠돌이 승려 출신으로 밑바닥에서 자수성가해 한 나라를 건국해 위세를 떨쳤고, 끝내는 부하들의 반란으로 몰락하며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궁예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그 자체로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실화였다. 이러한 궁예의 일대기와 독특한 캐릭터는 배우 김영철이 연기한 사극 <태조왕건>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줬다.
역사 기록에서 궁예는 정신질환이 의심되는 이상 행동과 가혹한 폭정을 저지르다가 민심을 잃은 '미치광이 폭군'의 이미지로 그려진다. 하지만 모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실제로 궁예가 무자비한 폭군에 불과했을까. 궁예라는 인물이 난세에 화려하게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과 하루아침에 몰락하게 된 진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지난 17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117회는 '궁예는 정말 미치광이 폭군이었나'를 통해 우리가 잘 몰랐던 궁예의 숨겨진 기록을 조명했다.
놀랍게도 궁예는 신라 왕실의 후손이었다. <삼국사기> '궁예 열전'에 따르면, 궁예의 본래 성씨는 김씨로 헌안왕(신라 47대 국왕) 혹은 경문왕(48대)의 아들이었다. 궁예의 출생연도는 857년(헌안왕설) 혹은 869년(경문왕설)으로 추정되며 분명하지 않지만 출생일만큼은 음력 5월 5일(단오절)로 확실히 기록됐는데, 이는 그의 운명이 바뀌게 된 직접적인 원인과 관련 있다.
당시 '5월 5일에 태어난 아이는 불길해 그 부모에게 해를 끼친다'는 속설이 있었다. 아이가 태어날 때 하늘에서 지붕 위로 수상한 빛이 내렸다거나 갓난아이에게는 보기 드물게 치아가 있었다는 사실도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여졌다. 이 때문에 궁예는 신라의 왕자로 태어나자마자 죽임을 당할 위기에 몰렸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러한 궁예의 출생 미스터리와 관련한 기록에 의문을 제기한다. 실제로 궁예의 출생일화와 비슷한 일화를 지닌 대표적인 인물이 있는데, 훗날 고려를 건국하게 되는 태조 왕건이다. 왕건 역시 태어날 때부터 치아가 있었고 얼굴은 이마뼈가 솟은 용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며 하늘에서는 신기한 광채가 내렸다고 알려졌다.
이처럼 평범하지 않은 출생신화는 영웅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왕건의 탄생은 비범하고 신비로운 일화로 해석되는 반면, 궁예는 불길한 취급을 당한 것으로 묘사됐을까.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이는 당시 역사를 집필했던 세력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 궁예와 관련한 대표적인 기록은 대부분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기반한다. <삼국사기>는 궁예를 멸망시킨 왕건이 건국한 고려에서 편찬했던 역사서다.
또한 <고려사>는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의 유학자들이 편찬한 기록이다. 조선은 건국의 정통성을 옹호하기 위해 건국군주인 이성계를 고려의 창업군주 왕건의 행보와 비교해 미화해야 했다. 그 대척점에 있던 궁예와 관련한 서술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고려사>는 고려 전반기의 건국 과정을 긍정적으로 서술한 반면, 후기로 갈수록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고려를 부정적으로 서술한다. 동일한 사실이라도 역사는 결국 서술자의 관점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점이다.
궁예는 아버지(헌안왕 혹은 경문왕)의 묵인하에 자객에 의해 죽을 고비에 놓이지만, 유모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주해 한동안 은둔생활을 한다. 기록에 따르면, 지붕에서 내던져진 아기 궁예를 유모가 받으려다가 실수로 눈을 찔러 애꾸가 됐다. 이후 장성한 궁예는 신분을 감추고 승려가 됐고, 한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다.
9세기 말에 접어들어 신라의 왕실과 귀족들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부패했고, 정부가 지방 통제력을 잃는 등 한반도는 군웅할거(수많은 영웅들이 자신의 근거지를 차지한 채 세력을 다투는 것 - 기자 말)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며 성장한 궁예는 점차 혼란한 세상을 바꾸겠다는 포부를 가졌고, 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처음에 궁예는 죽주 출신의 호족이던 기훤에게 의탁했지만, 기훤은 승려 출신에 세력도 별 볼 일 없던 궁예를 홀대했다. 이에 실망한 궁예는 기훤의 경쟁자이던 북원(현 강원도 원주)의 대호족 양길의 수하로 들어간다.
궁예는 양길의 신임을 얻어 많은 전공을 세우며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다. 궁예는 양길의 명을 받아 정벌 활동을 펼치다가 부석사(현 경북 영주)라는 사찰을 지났는데, 이곳에는 신라 국왕의 초상이 걸려있었다.
궁예는 왕의 초상을 단칼에 베어버리며 신라 왕실에 대한 적대감을 강하게 드러냈다. 궁예의 파격적인 행동은 당시 신라 왕실에 애매한 태도를 보이던 다른 호족들과는 다른 것으로 분명한 반(反) 신라 노선을 표명한 것이었다. 궁예의 선언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각시키며 휘하 세력 결속을 위한 정치적인 행위였다는 해석도 있다.
▲ tvN '벌거벗은 한국사' 궁예편 |
ⓒ tvN 스토리 |
정벌활동을 통하여 점차 세력이 커진 궁예는 은인이자 군주였던 양길을 배신하고 독립을 선언한다. 898년경에는 양길을 무너뜨리고 한반도 중부를 석권한다. 궁예 세력이 패서 일대를 평정하면서 당시 송악(현 개성)의 유력한 고구려계 호족이던 왕륭과 왕건 부자도 이 무렵 궁예의 휘하로 들어온다.
궁예 열전은 궁예가 "사졸과 즐거움과 괴로움, 어려움과 편안함을 함께 하였고, 상벌익 공정하여 사사로움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당시만 해도 궁예가 탁월한 인품과 통솔력을 바탕으로 민심을 크게 얻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901년, 궁예는 마침내 송악을 수도로 국호를 '고려'로 정하며 건국을 선포한다. 궁예가 난세에 뛰어든 지 불과 10년 만이었다. 당시 궁예 지지 세력의 중심은 고구려계 패서 호족들이었고 이들은 모두 반 신라 정서와 고구려 계승의식이 강했다. 고려라는 국호나 송악을 도읍으로 정한 것 모두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정체성을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계산이었다.
이후 궁예는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911년에는 태봉(泰封)이라는 이름으로 바꾼다. 궁예의 세력이 점점 커지고, 신라와 백제계들까지 편입되자 고구려 계승의식만으로는 방대해진 세력을 통합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마진은 '동쪽의 큰 나라', 태봉은 '조화롭고 이상적인 낙원'을 의미한다. 모두 고구려 계승의식을 강조한 고려보다 더 포괄적인 비전을 담고 있다. 오늘날 흔히 알려진 '후고구려'는 당대에서는 쓰이지 않았던 표현으로 훗날 패서계 호족 출신인 왕건이 궁예와 태봉을 멸망시키면서 다시 고려라는 이름을 회복했다.
이러한 잦은 국호 변경의 이면에는 왕건으로 대표되던 고구려계 호족 세력과 궁예의 갈등이 숨어있었다. 당초 궁예는 패서 호족들의 지지를 받아 건국에 성공했지만, 궁예의 세력이 커질수록 패서 호족들의 위세도 높아져 왕권에 위협이 됐다.
궁예는 국호 변경만이 아니라 905년, 수도를 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겼다. 여기에는 패서 호족들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정치적 계산과 남진정책으로 신라와 후백제를 견제한다는 명분도 있었다.
한편으로 궁예는 자신만의 이상국가 건설을 위한 포부를 드러냈다. 궁예는 자신의 왕국을 신라의 신분 중심 사회가 아닌 '능력 중심의 사회'로 만들겠다는 파격적인 발상을 실천에 옮겨갔다. 그는 관직 체계를 9등급으로 나누어 신분과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등용했고, 통합 국정기구인 광평성(오늘날의 국무회의)을 설치해 행정에서 군사 업무까지 총괄했다.
궁예의 또 다른 이상은 종교와 정치를 통합한 신정(神政)국가의 건설이었다. 열전에 따르면, 언제부터인가 궁예는 황금빛 두건과 화려한 승려복으로 치장하며 스스로 '미륵불'이라고 자청했다. 스스로를 신격화한 것이다. 궁예는 자신의 두 아들에게도 각각 보살의 칭호를 내렸으며, 직접 경전을 짓고 법회를 열며 강론했다. 미륵신앙을 내세워 절대왕권을 강화하고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정당화하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궁예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점점 무리수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궁예가 선택한 통치방식은 철저한 '공포정치'였다. 궁예는 관심법(觀心法)을 내세워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고 했다. 관심법은 본래 불교의 마음 수련법 가운데 하나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성찰해 본래 자신의 마음자리로 돌아가는 참선을 의미한다.
그런데 궁예는 관심법을 마치 자신만의 '초능력'처럼 내세우며 대신들과 호족들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드라마에서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는가"라는 밈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드라마 속 관심법을 하던 궁예는 기침소리로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한 관료를 때려죽이기도 하는데, 이는 드라마의 창작이지만 궁예 시대에 공포정치 분위기를 잘 묘사했다.
고려사에 따르면, 궁예는 "나는 미륵 관심법을 체득해 부녀자들이 간통한 것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궁예로부터 음탕하게 불륜을 저질렀다는 누명을 쓴 여인들은 모두 잔혹하게 처형당했다. 심지어 궁예는 915년에는 자신의 처인 왕후 강씨 마저 불륜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고문 끝에 살해했다.
이러한 궁예의 기행이 왕권을 강화하고 호족 세력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계산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아내인 강씨는 패서계 호족 출신이었는데, 궁예가 자신을 거스르면 아내도 처형시킬 수 있다는 것을 다른 호족들에게 경고했다는 해석이다.
절대권력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궁예를 점점 고립시켰다. 궁예는 권력이 커질수록 점점 의심과 화가 많아졌고, 걸핏하면 사람을 죽였다. 열전은 "관료, 장수, 아전은 물론 평민에 이르기까지 궁예의 미움을 사서 죄없이 죽임을 당한 이가 부지기수였다"고 기록했다. 민심은 폭정을 일삼는 궁예에게 점점 등을 돌린다.
918년, 궁예의 최대 정적이던 패서계 호족을 대표하는 왕건이 마침내 역성혁명을 일으켜 태봉을 무너뜨리고 고려를 건국한다. 고려사에 따르면, 궁예는 난이 일어나자 궁궐밖으로 도망쳤으나 배고픔을 이기지못하고 보리 이삭을 잘라 먹다가 분노한 백성들에게 발각돼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궁예의 근거지였던 철원과 그 인근 지역에는 공식적인 역사 기록과는 다른 설화들도 전승된다. 왕건의 군사들에게 쫓기던 궁예가 포위되자 그대로 멈춰서서 무수한 화살을 맞고 선채로 당당히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병사들이 궁예의 시신을 발로 차고 떠밀어도 꿈쩍도 하지않았다는 말도 있다. 하는 수 없이 백성들은 궁예의 시신위로 돌을 쌓아서 돌무덤을 만들어줬다고 한다.
백성들에게 비참하게 죽었다는 공식 사서의 기록은 궁예를 폄하하려녀는 의도가 느껴진다. 반면 후자의 설화는 궁예의 최후를 훨씬 영웅적이고 비장해 보이게 묘사한다. 궁예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설화가 지어질 만큼, 당대에도 폭군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궁예가 백성들에게 인망이 있었다는 증거로 해석되기도 한다.
역사의 인물을 단편적인 시각으로만 정의 내리는 것은 어렵다. 궁예는 부인할 수 없는 폭군으로서의 면모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초라한 배경에서 출발하여 한 나라를 건국한 데서 보듯 지도자로서 비범한 재능 또한 분명히 가졌던 인물이었다. 또한 잔혹해 보이는 왕권 강화와 정적 숙청은 사실 고려 광종이나 조선의 태종, 명나라 태조 주원장 등 후대의 수많은 절대군주도 권력을 잡은 이후 하나같이 필수적으로 거친 과정이었다.
다만 그들과 궁예와의 차이는 역사의 승자가 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빛나는 이상이나 강대한 권력이 있더라도, 결국 사람들의 동의와 지지를 얻지 못한 권력이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면교사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궁예가 세운 기반은 이후 왕건에게 그대로 계승되며 결국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던 밑거름을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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