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팬들은 왜 홍명보 선임에 분노하나…사태 본질은 ‘무너진 시스템’
한국 축구 대표팀의 홍명보 감독 선임을 둘러싼 후폭풍이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감독 내정 발표 이후 2주가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축구팬과 축구인들은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감독 선임을 주도한 대한축구협회의 ‘무너진 시스템’에 있다.
현재 홍 감독은 외국인 코치 선임을 위해 유럽 출장길에 올라 공식 임무를 수행 중이다. 하지만 정당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선임된 그를 향한 비판은 여전히 거세다. 홍 감독과 함께 2002 월드컵 4강 신화를 썼던 박지성, 이영표, 이천수 등 축구인들은 차례로 목소리를 냈다. 하나같이 홍 감독 선임 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의견이었다.
국가대표 주장 출신 구자철은 18일 SNS를 통해 “협회의 행정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가면 솔직히 미래는 없다”며 “(축구인들의)의견을 무조건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는 2012 런던올림픽과 2014 브라질월드컵 때 홍 감독과 사제지간이었다.
홍 감독은 위르겐 클린스만 전 감독이 경질된 지난 2월부터 차기 사령탑 유력 후보로 거론됐다. 프로축구 K리그 울산HD의 지휘봉을 잡고 있던 그는 줄곧 대표팀 감독을 맡는 일은 없을 거라고 강조해 왔다. 불과 지난 5일 수원FC전을 앞두고도 “(협회와)만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그랬던 그가 한순간에 말을 뒤집었다. 협회는 지난 7일 홍 감독 내정 사실을 알렸다. 홍 감독은 “저는 저를 버렸다” “내 인생의 마지막 도전을 응원해 달라”고 말했다. 자신이 한 선택을 두고 한국 축구를 위해 희생한다는 느낌을 주는 발언에 팬들의 배신감과 분노는 치솟았다. 대표팀에 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지 못했다.
감독 선임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 절차마저 생략된 채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됐다. 감독 선임을 주도했던 정해성 전력강화위원장과 일부 위원들이 중도 사퇴했으나, 위원회 재편은 없었다. 한국축구지도자협회는 “위원장을 다시 선임하고 위원회를 다시 꾸려 일을 매듭짓는 게 상식인데, 이런 절차가 철저히 무시됐다”고 비판했다.
협회 수장인 정몽규 회장의 말 한 마디에 이임생 기술총괄이사가 감독 선임의 전권을 쥐었다. 이 이사는 “(정 회장이)모든 결정을 다 해 나가라고 하셨다”고 밝혔다. 직접 해외에 나가 외국인 후보자들의 면접을 봤던 이 이사는 홍 감독의 자택 앞에 찾아가 구두로 감독직 수락을 요청했다.
감독 내정 발표 직전에는 전력강화위원 11명 중 남은 5명에게 개별적 동의만 받아 최종 결정을 내렸다. 회의를 열어 최종 후보 1인을 세밀하게 검토하는 작업은 없었다. “외국인 후보자의 능력이 부족했다”는 이 이사의 설명은 축구팬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위원으로 활동했던 국가대표 출신 박주호는 홍 감독 선임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폭로와 함께 협회 행정을 비판했다. 협회는 박주호가 비밀유지서약을 어겼다며 법적대응을 시사해 논란에 불을 지폈다.
모든 게 속전속결로 마무리됐다. 홍 감독 선임은 지난 13일 협회 이사회 승인까지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끝없는 잡음에 문화체육관광부까지 나섰다. 문체부는 협회 운영 전반과 대표팀 감독 선임 과정을 조사하기로 했다. 협회는 정부가 협회 행정에 개입하면 국제축구연맹(FIFA) 규정에 따라 월드컵 출전권을 잃을 수 있다는 논리로 맞섰다. FIFA 정관 14조 1항과 15조 등에는 “회원 협회는 독립적으로 운영돼야 한다. 제3자의 간섭을 받아선 안 된다” “모든 정치적 간섭으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FIFA가 해당 조항을 근거로 경고 수준을 넘어선 제재를 한 적은 거의 없다. 프랑스는 2010 남아공월드컵 16강 진출 실패 후 도메네크 감독과 장-피에르 에스칼레트 협회장을 국회 청문회에 세웠다. 당시 제프 블라터 FIFA 회장은 “프랑스 협회는 국가 권력기관의 정치적 간섭이 있다면 지원을 요청할 수 있다”고 했을 뿐 실질적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브라질 법원이 지난해 12월 축구협회장 선거 무효 판결을 내렸을 때도 권고 이상의 조치는 없었다.
협회 내부에선 문체부와 대립각을 세운 대응 방식에 회의적인 목소리도 나온다. 협회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이날 국민일보에 “협회가 FIFA 규정을 언급하는 건 국회의원들이 불체포특권을 언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지금과 같은 사안에 그 잣대를 들이대는 건 옳지 않다. 합리적인 선에서 감사든 조사든 받으면 된다”고 말했다.
박구인 이누리 기자 capta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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