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어설픈 해외첩보 활동…한인에 접근, 일 터지면 모르쇠

김형구, 강태화 2024. 7. 18.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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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전문가인 수미 테리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이 미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사실상 한국 정부를 위해 일한 혐의로 16일(현지시간) 미 연방법원 재판에 넘겨졌다. 미국 뉴욕 남부지검은 이날 공개한 공소장에서 외국대리인등록법(FARA) 위반 혐의로 수미 테리 연구원을 기소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공소장에 첨부된 것으로 테리 연구원이 국정원 화이트 요원과 미 현지 한 레스토랑에서 만나 식사하는 모습. 사진 미국 뉴욕 남부지검 공소장 캡처

한국계 미국인 수미 테리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이 사실상 한국 정부를 위해 일한 혐의로 기소된 것을 계기로 미 현지에서 활동하는 국가정보원 요원들의 주먹구구식 첩보 수집 활동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미국에 파견된 국정원 요원들이 미국의 정책 입안 과정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전문가를 접촉해 관련 정보를 파악하고 정부 입장을 알리는 것은 일반적인 업무 영역에 속한다. 문제는 테리 연구원 사건을 통해 나타난 국정원 요원들의 어설픈 활동이 곳곳에 드러나면서 정상적 정보 활동조차 위축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점이다.

먼저 ‘보안’과 ‘은밀성’을 생명으로 하는 첩보 활동의 기본부터 지켜지지 않았다. 테리 연구원에 접촉해 식사를 대접하고 명품 가방과 옷을 선물한 국정원 요원들은 신분을 숨기고 비밀리에 활동하는 ‘블랙’ 요원이 아니라 외교관 타이틀로 신분이 어느 정도 노출되는 ‘화이트’ 요원이다. 이들은 대낮에 테리 연구원과 함께 명품 매장에서 쇼핑을 하고 도심을 활보했다. 국무부 비공개 회의 내용을 넘겨받는 과정에서 한국 외교관 번호판이 버젓이 노출된 차량을 국무부 앞에 대는 등 ‘흔적’을 곳곳에 남긴 것으로 나타났다.

테리 연구원과 같이 미 정부 고위직에 진출한 한국계 미국인들이 국정원 요원에게 가장 쉬운 ‘먹잇감’이라는 건 이미 현지 한인 사회에서는 널리 알려진 얘기다. 워싱턴 DC 인근에 거주하는 한인 A씨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미 국무부 등 핵심 정부 기관을 직접 뚫지 못하니까 한국말이 능한 미 정부 고위 인사가 1차 접근 대상이 된다”며 “미 정부와 한국 국정원 사이에 가장 약한 고리로 한국어와 영어가 동시에 되고 미 고위직 네트워크를 갖춘 일부 한인들이 국정원 요원 타깃이 되는 구조”라고 말했다.

대북 전문가인 수미 테리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이 미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사실상 한국 정부를 위해 일한 혐의로 16일(현지시간) 미 연방법원 재판에 넘겨졌다. 미국 뉴욕 남부지검은 이날 공개한 공소장에서 외국대리인등록법(FARA) 위반 혐의로 수미 테리 연구원을 기소했다고 밝혔다. 사진은 공소장에 첨부된 것으로 테리 연구원과 국정원 화이트 요원이 명품 매장에서 쇼핑을 하는 모습. 사진 미국 뉴욕 남부지검 공소장 캡처

정보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포섭’ 대상이 특정되면 국정원 요원들은 “식사 한번 같이 하자”며 접근한다고 한다. 월 1회, 또는 분기별 1회 등 주기적으로 다가가 친분을 쌓은 뒤 고급 식당 등에서 만나 필요한 정보 수집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미 현지 한인 B씨는 “식사를 모시겠다면서 접근하는 국정원 요원을 몇 차례 거절 끝에 만난 적이 있는데 국무부 고위 관료가 자주 찾는 단골 한인 세탁소 사장이 어떤 분인지 알려달라는 식으로 물어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한인 사회에서 가장 비판이 큰 지점은 국정원 요원들이 한국계 고위직 인사나 전문가들을 정보 수집 대상으로 ‘활용’만 할 뿐 제대로 ‘보호’해주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A씨는 “수미 테리 사건도 이미 오래전부터 떠돌던 얘기를 단순히 정리하는 수준에서 얘기한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며 “문제는 사건이 터지면 정보원으로 지목된 한인을 국정원에서 방어해주지 않고 대개 3년인 미국 파견 근무 기간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가면 ‘모르쇠’로 나온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건 여파는 한인 사회가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한인 C씨는 “로버트 김 사건 때 국무부ㆍCIA 등에서 일하는 한국계 미국인들의 주요 정보 접근권이 하루아침에 급전직하했고 이들의 주요 보직 승진도 곳곳에서 막혔다”며 “이번 수미 테리 사건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한국계 미국인 로버트 김은 주미 한국대사관에 파견된 국방무관에게 미국의 기밀 정보를 넘긴 혐의로 1996년 미 FBI에 체포됐다. 로버트 김 가족들은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한국 정부는 개인의 문제라며 선을 긋고 지원해줄 수 없다고 했다. 이 사건으로 한국계 미국인들의 미 정부 기관 입성 및 승진이 대폭 까다로워졌다.


"왜 하필 한국이 본보기?"


한편 수미 테리 사건에 대해 주미 대사관 등 외교가에선 ‘입단속’을 벌이면서도 “대선을 앞둔 민감한 시기에 왜 하필 한국이 본보기가 됐느냐” 말이 나오며 술렁였다.

한 외교소식통은 “미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핵심 동맹국인 한국을 본보기로 삼을 경우 전세계에 ‘예외는 없다’는 강한 메시지를 발신할 수 있게 된다”며 “다만 과거의 사례를 꺼내 지금처럼 민감한 시기에 발표한 배경에 대해선 우려가 된다”고 말했다.

또다른 인사는 “현재까지 혐의는 미국인인 수미 테리 개인이 미국의 국내법을 위반한 것으로 한정돼 있다”며 “다만 국정원이 FARA를 위반한 수미 테리의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거나, 더 나아가 수미 테리가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도록 FARA 위반을 방조하거나 요구했다면 문제가 될 소지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어떤 상황이 됐든 미국이 작정하고 한국 정보 기관을 특정하면서 앞으로 상당 기간 정보 수집활동에 큰 제약이 따를 것”이라고 덧붙였다.

밀워키=김형구·강태화 특파원 kim.hyoungg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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