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계 ‘신스틸러’ 고무… GM·BMW도 우리 부품 씁니다
요즘 같은 장마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 당신의 자동차에 부품 ‘실링’(Sealing)과 ‘브레이크 호스’(Brake Hose)가 없다고 가정해보자. 실링이 없는 자동차 내부는 바람 소리(풍절음) 때문에 조수석에서 말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테고 유리창과 차체 사이에서는 물이 샐 것이다. 브레이크 호스가 없으니 브레이크 페달을 아무리 밟아도 속도는 줄지 않을 것이다. 이 부품이 없다면 자동차로서 기능을 못 한다는 뜻이다.
지난 4일 찾은 경남 양산 교동 유산공단에 위치한 화승알앤에이(화승R&A) 공장. 축구장 약 15개 크기의 공장 부지에 사무실과 주요 부품의 생산·조립동 등이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어 하나의 거대한 마을처럼 느껴졌다. 중견기업 화승알앤에이는 이곳에서 3만여개의 자동차 부품 중 안전과 직결되는 실링과 브레이크 호스를 주력으로 생산한다.
1300평 규모의 실링 압출동에 들어서니 40도의 후끈한 열기와 고무 냄새가 온몸을 덮쳤다. 압출기에서 실링의 기본 형태를 갖춘 고무들이 쏟아져 나왔다. 갓 뽑은 고무에서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고무의 최고 온도는 섭씨 200도에 달하지만, 레일을 따라 자동으로 냉각기까지 이동하기 때문에 작업자가 고온의 고무를 접촉할 일은 없다.
이 고무는 레일을 타고 일정 시간 이동하며 열을 식힌 뒤 물을 뿌려주는 냉각기에 도착한다. 뜨거운 고무가 상대적으로 차가운 물을 바로 만나면 변형이 올 수 있어 냉각기에 들어가기 전 일차적으로 열을 식히는 과정이다. 냉각기에서 나온 고무는 공기분사기를 거치며 물기를 털어내고 코팅기로 이동한다.
코팅이 끝나면 레이저가 고무에 생산라인·생산일자·제품명·차종 등을 각인한다. 이후 절단기에서 설정된 길이에 맞춰 고무를 자동으로 자른다. 절단된 제품은 작업자의 확인을 거친 뒤 후가공 설비로 이동한다. 후가공이 끝나면 동그란 훌라후프 형태의 실링 완제품이 비로소 탄생한다. 이를 고객사인 완성차 업체로 보내면 차량의 보닛, 트렁크, 차 문 등에 이 실링을 끼워 넣는 것이다. 자동차 창문을 내렸을 때 자동차 문 쪽에 만져지는 고무가 바로 실링이다.
현재 화승알앤에이는 실링 생산라인 9개를 보유 중이다. 여기에서 일주일 만에 80만~90만m의 실링을 뽑아낸다. 강동영 화승알앤에이 선임은 “완제품으로 만드는 실링의 종류만 22개”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만드는 실링은 현대차·기아의 20개 이상 차종을 비롯해 미국 스텔란티스와 제너럴모터스(GM), 베트남의 테슬라로 불리는 빈패스트에 납품 중이며, 올해 하반기부터는 인도 마힌드라앤마힌드라에도 공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압출동 한쪽에는 통유리로 내부가 훤히 보이는 종합상황실이 있었다. 올해 초 김형진 화승알앤에이 대표가 테크기업으로의 전환을 선언하면서 새롭게 만든 공간이다. 상황실에는 라인별로 자재 불량률과 설비 고장 발생 등을 확인할 수 있는 모니터 십여개가 설치돼 있었다. 지난 3월에는 실링 압출동에 ‘인공지능(AI) 예방 보전 시스템’도 도입했다. 이 AI 시스템은 압출기 내부의 진동 횟수와 고장 발생 상황을 학습한다. 진동 횟수가 평균에서 벗어나면 AI가 ‘설비 의심 상태’ 알람을 보내주는 식이다. 강 선임은 “이 같은 테크 기술을 통해 문제가 발생하면 빠르게 해결하고 균일한 품질의 제품이 나오게끔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링 압출동에서 도보 10분 거리에는 브레이크 호스 조립동이 있었다. 조립동에 들어서자 일정하게 반복되는 기계음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공장 내부를 채우고 있는 자동화 설비에는 작업복을 입은 근로자가 한 명씩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도윤희 화승알앤에이 책임은 “자동화 설비에서 호스에 금구(자동차 유압장치에 호스를 연결하기 위한 금속 장치물)가 체결되고 압력을 검사하는 과정까지 이루어지는데, 모든 절차를 작업자들이 제어하고 있다”며 “조립동에서 하루에 조립할 수 있는 브레이크 호스 수량은 약 12만5000개로 현재 공장 가동률은 80%”라고 말했다.
운전자가 자동차 브레이크를 밟으면 답력(페달을 밟는 힘)이 바퀴로 전달되면서 차가 멈추는데, 브레이크 호스는 이 힘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자동차가 거친 주행 환경에서도 제동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호스의 내구도가 강하고, 금구와의 결합도 완벽해야 한다.
전 세계 완성차 업체에 제품을 공급하는 화승알앤에이는 한 박자 빠른 대응을 중시한다. 현대차·기아·한국GM·르노삼성 등 국내 자동차 업체뿐 아니라 BMW·벤츠·폭스바겐 등 해외 완성차 업체에도 제품을 납품하고 있는데, 고객사마다 원하는 제품의 규격과 성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조립동에 각 사의 요구사항을 맞출 수 있는 자동화 기기를 들인 이유이기도 하다. 화승알앤에이는 고객 니즈와 생산 계획에 맞춰 기기별로 필요한 제품을 생산한다. 도 책임은 “폭스바겐에만 10개의 차종에 브레이크 호스를 납품한다”면서 “이곳에서 만든 브레이크 호스는 독일·스페인·인도 등 전 세계로 팔려나간다”고 전했다.
71년 전 고무신 회사서 출발… “이젠 글로벌 부품 최고 기업에 올라설 것”
"화승알앤에이가 만드는 제품은 (완제품 안에 들어가 있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보안 부품입니다."
지난 4일 경남 양산 화승알앤에이(화승R&A) 집무실에서 만난 김형진(사진) 대표이사의 눈빛은 부드럽지만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1998년 입사해 26년을 근속한 '화승맨' 김 대표는 화승알앤에이 역사의 산증인이다. 2006년부터 2년간 독일에서, 2008년부터 2021년까지는 미국에 주재하며 해외 시장을 개척했다. 김 대표는 2022년부터 화승알앤에이와 화승티엔드씨(화승T&C)의 대표이사를 겸하고 있다. 화승티엔드씨는 화승알앤에이에 제품을 공급하는 화승그룹의 계열사다.
2021년 13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김 대표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지게차와 트럭 그리고 작업자들이 뒤엉켜 다니는 공장 모습이었다. 김 대표는 "겉으로 보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작업이 비효율적이었고 직원들도 관습에 익숙한 듯 위험에 노출돼 보였다"고 말했다. 이에 김 대표는 공장 부지 전체에 푸른색 보행로를 깔았다. 보행로가 생긴 이후로는 직원들은 좀더 안전하게, 지게차나 트럭들은 조금 더 효율적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
김 대표는 과거엔 당연했던 것들이 더는 당연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화승티엔드씨가 삼성전자의 대·중소 상생형 스마트공장 지원 사업의 도움을 받은 것도 이 연장선이다. 김 대표는 "삼성 측에 '저희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제대로 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는 건지 제삼자의 눈으로 기초부터 들여다 봐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고 했다. 현재 화승티엔드씨는 스마트공장 도입 1년차로 공장 제조공정진단 및 혁신과제발굴을 통한 단계별 중장기 로드맵을 수립한 상태다. 2026년까지 스마트팩토리와 연계된 제조통합관리시스템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다.
화승알앤에이의 모기업인 화승은 1953년 고무신을 만드는 '동양고무'로 출발했다. 화승은 지난 1978년 동양화공(화승알앤에이)을 설립해 고무를 원료로 하는 자동차 부품 시장에 진출하며 사업을 다각화했다. 그 결과 현재 국내에 공급되는 브레이크 호스의 60%가 화승알앤에이 제품이다. 실링의 경우 국내 자동차 2대 중 1대에 화승알앤에이의 제품이 들어간다. 김 대표는 "7월 현재 최대 수출 시장인 북미에서 수요가 늘면서 매출액이 목표 대비 10% 이상 증가했다"며 "올해 하반기에도 글로벌 수요를 바탕으로 수출 실적이 더 좋아질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2023년 화승알앤에이의 매출은 6806억원에 달한다.
화승알앤에이는 최근 친환경 자동차 부품 사업 연구·개발(R&D)도 강화하고 있다. 호스류의 경우 전기차 업계에서 수요가 늘고 있다. 전기차는 냉각 시스템이 내연기관차보다 더 복잡해 많은 호스가 필요하다. 이에 화승알앤에이는 고무 위주의 제품뿐만 아니라 플라스틱 튜브 제조라인을 새롭게 구축하고 공법을 개발하는 등 경쟁력을 키우고 있다. 김 대표는 "화승은 어려울 때마다 새로운 사업을 개척하고 동력을 만들어 왔다"며 "앞으로도 끝없는 혁신을 통해 100년 기업으로 도약하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인터뷰 끝 무렵, 사무실 벽면에 붙어있는 'Impossible Future Statement'(불가능해 보이는 미래에 대한 성명서)라고 적힌 액자가 눈에 띄었다. 액자에는 '조직문화 면에서 이직률 제로(0) 기업, 성과 면에서 글로벌 부품업계 최고의 테크기업'이라고 적혀있었다. 김 대표는 "목표를 잊지 않기 위해 벽에 붙여 놓았다. 언젠가는 실현 가능하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양산=백재연 기자 energ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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