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병원 응급실에서 7시간,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스코틀랜드로 온 지는 3년 되었습니다. 틸리라는 조그만 마을에 영국인 남편과 세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국적도 자라 온 배경도, 피부색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 곳의 소식을 전하고 싶습니다. <기자말>
[제스혜영 기자]
며칠 전 편도염에 걸렸다. 목이 아프다 싶었는데 점점 입으로 들어가는 것과 말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나는 영국에서 독한 감기가 걸릴 때면 병원에 가질 않는다. 몇 번 갔다가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영국에서 처음으로 가정전문 클리닉을 방문한 적이 있다. 영국은 개개인 가정의학 의사(General Practitioner, 아래 GP)가 있는데, 아플 땐 이 가정전문 클리닉을 먼저 가야 한다. 여길 안 거치고 큰 병원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때 나는 지독한 감기에 걸렸었다. 고열에 몸살 기운까지 돌아서 갔었는데 의사는 항생제를 주지 않았다(항생제는 약국에서 팔지 않는다).
그런데 그 의사는 '집에 가서 꿀이랑 레몬 넣은 차를 만들어 먹으라'는 말만 했다. 솔직히 기가 막혔다. 그런 말은 의사가 아닌 나라도 할 수 있는 소리니까. 그제서야, 펄펄 뜨거운 열이 나더라도 병원은커녕 약도 잘 먹지 않던 남편, 병원보다는 레몬차나 생강차를 찾았던 그가 이해가 갔다. 그렇게 몇 번이고 항생제를 못 받게 되면서 터득하게 됐다. 다음 감기엔 클리닉보다 레몬 꿀차를 선택하라는 걸.
그러나 이번엔 전혀 다른 차원의 통증이 찾아왔다. 양쪽 편도에 커다란 혹이 달렸는데 이게 위아래, 양옆으로 부풀어가면서 말 못 하는 걸 넘어서 침 삼킴마저 너무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 응급실 입구 |
ⓒ 제스혜영 |
새벽 5시 반, 그런데 어째 응급실 대기실이 도서실인가 착각할 만큼 조용하다. 소리를 낮추며 신음하는 사람들의 소리가 중간중간 들릴 뿐이었다. 병원 절차를 밟고 간호사가 여러 질문을 할 때면 남편이 대답하다가, 어떤 질문에선 내가 흰 종이에 적어야만 의사전달이 가능했다. 그때만 해도 심하게 부은 편도가 목구멍까지 짓눌러, 콧구멍이 아직 열려 있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하다고 생각했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한쪽 TV를 쳐다봤는데 대기시간이 '(지금부터) 7시간 30분'이라고 무시무시한 빨간색으로 떠 있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 TV속에 적힌 충격적인 대기 시간. '(지금부터) 7시간 30분'이라이라고 무시무시한 빨간색으로 떠 있었다. 과장인 줄 알았다. |
ⓒ 제스혜영 |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네 시간이 지나도 내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빠지는 사람은 없고 들어오는 사람만 계속 늘어나면서 대기실 의자가 꽉꽉 찼다. 나는 결국 폭발했다.
"이게 무슨 응급실이야? 여긴 통증을 최대한으로 길게 끌어내는 고문실이야!"
다섯 시간, 여섯 시간째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콧구멍이 열렸다는 감사는커녕 극심한 화가 화산처럼 치솟았다. 고통에 취한 사람처럼 순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다 엎어버리고 싶었다. '몸을 순식간에 녹일 만큼 끓어오르는 고통이 터져버렸는데, 너네가 이 고통, 내 마음을 알아?'
▲ 이비인후과 병실에서 |
ⓒ 제스혜영 |
대기시간 7시간 10분이 지나서야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좀비상태로 있던 나에게 내 이름이 귓구멍에 들어 올 리가 없었다. 남편이 내 어깨를 몇 번 두드리는 바람에 그제야 휘청이는 다리를 겨우 일으키며 일어났다.
응급실에 들어서자 환자들이 빼곡하게 모든 침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빈 침대로 옮겨지자 간호사는 피검사와 항생제, 수액 주사를 놓기에 바빴다.
"저도 편도염에 걸려봐서 알아요. 얼마나 아팠는지... 그 마음 너무 이해해요. 빨리 낫길 바라요."
"이름이 헤이영 맞나요? 제가 맞게 발음했다면 좋겠네요. 많이 배고프실 텐데 제가 음식 주사로 쫙쫙 넣어드릴게요."
▲ 병원에서 나온 저녁식사 |
ⓒ 제스혜영 |
급하게 오느라 핸드폰 충전기가 없었는데 간호사가 스스럼없이 내 핸드폰을 가져가 충전해 주었다. 다행히 샴푸와 비누는 챙겼는데 수건을 빼먹고 왔다. 샤워는 포기해야지 했는데, 아침이 되자 조무사가 수건을 한 장 갖다 주었다.
"여기 야식도 있어요. 혹시 배가 고프면 나한테 말해요. 먹을 것 좀 갖다 드릴게요."
"장기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혈액순환을 위해 압박양말을 신으세요. 12시간만 신고 있으면 돼요. 여기 있어요."
어쩜 이렇게도 세심한 배려와 따뜻한 친절을 가진 천사들이 이곳에 다 모였을까. 7시간 10분 동안 징글징글하게 고문받았던 고문실에 대해 조금은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일요일 새벽에 응급실에 도착했다. 하룻밤만 병원에 입원한 후 그 다음 날 오후에 기쁘게 퇴원을 했다. 그런데 증상이 곧 다시 심해져서 월요일 저녁 눈물을 머금고 '고문실'(응급실)로 다시 끌려갔다. 그날은 6시간을 좀비처럼 기다렸다.
'모든 국민의 질병을 국가가 책임진다'는 말, 의미는 좋지만
영국은 모든 국민(6개월 이상 거주 외국인 포함)에게 지불 능력이 아닌 필요에 따라 공평한 의료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한다는 취지 하에 1948년 국가의료제도(National Health Service : NHS)를 설립했다. 모든 국민의 질병을 국가가 100% 책임지는 제도로 영국에서 자랑하는 제도다. 그렇지만 환자들뿐만 아니라 의료원들도 징글징글하게 고생하는 것 또한 현실이다.
영국의 메딕포털 사이트에 의하면 2024년 영국의 국가의료제도(NHS)가 직면한 세 가지 주요 과제는 이렇다고 한다.
첫째, 자금 부족. 의료 서비스에 대한 수요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지만 NHS에 할당된 자금의 부족으로 대기 시간이 길어지고, 특정 치료에 대한 접근이 제한되며, 고품질 진료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둘째, 인력 부족. NHS는 의사, 간호사, 관련 의료 전문가를 포함한 다양한 의료 직업 전반에 걸쳐 심각한 직원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기존 인력에 엄청난 압박이 가해지면서 업무량이 증가하고 소진되기 쉽고 환자 치료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셋째, 인구 노령화. 영국의 인구는 노령화되고 있다. 인구 노령화는 만성 질환의 유병률이 높아지고 복잡한 의료 요구가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장기 요양, 전문 노인 서비스, 임종 간호를 포함한 의료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어서 이런 서비스 개선에도 충족되어야 한다.
영국 가디언지에 따르면 영국 국민의 4명 중 1명은 GP(일반의)와 직접 만나지 못한 후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라인이나 약국에서 약을 구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6명 중 1명(16%)은, 스스로 치료하거나 의료 전문가가 아닌 다른 이에게 진료를 요청한단다.
보통 오전 8시가 되면 클리닉의 방문 예약이 가능하다. 그런데 백이면 백, 대기번호가 20이 넘는다. 한 시간은 넘게 있어야 통화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스코틀랜드는 병원뿐 아니라 처방약도 무료다. 때문에 돈 없는 사람들이라도 일단 기다리기만 하면 치료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약물이나 초음파, MRI 검사, 수술 등을 필요 이상으로는 하지 않아서 좋다. 병원에서 만났던 천사 분들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두 번째 입원했을 때는 저녁을 먹고 산책을 했다. 주사는 꽂혔는데 수액줄을 끊어 주니 가볍게 한 시간 동안 산책을 할 수 있었다. 확실히 스코틀랜드라는 생각이 들었던 건 이 병원 주위가 다 산으로 둘러 싸여 있다는 것. 포스 밸리 왕립 병원(Forth Valley Royal Hospital) 환경이 호텔 5성급과 맞먹는 것 같아서 걸으면서 병이 다 낫는 기분이었다.
막상 입원해보고 나니 영국 의료제도의 장점과 단점을 살펴볼 수 있었다. 어느 나라라고 의료제도에 문제가 없겠는가. 다만 영국의 의료제도가 조금은 더 개선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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