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 제도' 갑오개혁 때라 일제와 무관? 틀렸다
[소준섭 기자]
▲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
ⓒ 연합뉴스 |
최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후보가 검사 권한이 일제 시대 때 부여됐다고 주장한 데 대해 법무부는 "일제 시대와 무관하며 갑오개혁 때 도입된 것"이라고 반박했다. 한편, 몇 년 전에 필자는 2급 공무원 명칭인 이사관이 구한말 통감부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며, 또 서기관을 비롯하여 사무관, 주사 등의 공무원 명칭 역시 일제 잔재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당시에도 한 언론은 서기관 등의 명칭들이 갑오개혁 시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제 잔재'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었다.
과연 갑오개혁 때 만들어진 것이라서 일제 시대와 무관할 것일까?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이러한 주장은 역사적 팩트와 거리가 멀다. 갑오개혁이야말로 철저히 일제에 의해 주도된 것으로서 갑오개혁 때 만들어진 것은 일제 시대와 너무 밀접한 것이며, '일제 잔재' 그 자체다.
일본식 '갑오개혁', 식민지를 위한 법제 구축
1894년, 일제는 동학농민혁명을 빌미로 하여 조선에 무단 진출하였다. 당시 조선 정부는 농민군과 화약을 맺고 청나라와 일본 양국에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청하였다. 청나라는 이 요청에 응하였지만 일본은 거부하였다. 일본은 조선 내정에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 이러한 변란이 계속 일어나고 있으므로 내정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전까지는 철수할 수 없다고 강변하였다. 일본이 내세운 동학농민군 진압은 명분이었을 뿐이었고, 청나라 세력을 조선으로부터 축출하고자 한 것이 일본 파병의 중요한 목표였다.
일본의 또 다른 중요한 목표는 바로 경복궁 점령과 고종의 신변 확보 그리고 조선군 무장 해제였다. 일본은 '정한론(征韓論)'의 기치 하에 1876년 강화도 침략 이후 조선 식민지화 방책을 치밀하게 연구하고 준비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빌미로 그 계획의 현실화에 착수했던 것이었다. 물론 일본의 최종 목표는 '조선의 식민지화'였다.
당시 일본이 조선에 파병했던 총 병력은 8000여 명이었다. 이들은 조선에 상륙하자마자 조선 정부와 전혀 합의 없이 임의로 경부 간 전선 가설을 무단으로 진행하였다. 그러면서 5000명의 병력을 서울에 주둔시켰다. 이미 '의도'가 다른 데 있었던 것이다. 그 주력은 용산에 주둔했고 아현을 비롯해 공덕, 만리창 등 요충지마다 병력이 배치되었다. 한눈에 경복궁을 파악할 수 있는 북악산과 남산에는 포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7월 23일(이하 양력) 새벽에 경복궁 서쪽에 위치한 영추문을 부수고 진입, 조선수비군을 제압하고 건청궁에서 고종의 "신변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고종을 강박해 작성된 교지(敎旨)로써 조선군을 무장 해제시켰다. 당시 일본공사 오토리(大鳥) 공사는 조선 정부에게 이른바 '내정개혁방안 강령 5개조'를 강요하였다.
어디까지나 일본에 종속된 친일 정권 수립이 저들의 목표였다. 일본의 준비된 계획에 따라 알본 앞잡이 내각을 내세워 7월 27일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고, 나흘 뒤에는 일본식 관료제도인 '의정부 관제안'이 가결되어 8월 13일 조선 전역에서 정식으로 시행되었다. 조선의 모든 제도와 법령을 일본식으로 전환시키려는 조치가 이뤄졌고, 이것이 이른바 갑오개혁이었다. 이 갑오개혁을 통하여 일본 식민지로 가는 법제를 미리 구축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갑오개혁의 주도자였던 김홍집은 조선인들로부터 '왜대신(倭大臣)'이란 비난을 받았으며, 일본 세력에 의해 명성황후가 참살된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받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 아관파천 당시 성난 군중들에 의해 타살되었다.
잘못된 '갑오개혁'이란 용어, '왜란'이며 '정변'
결국 갑오개혁이란 근대성을 포장한 일제의 침략 도구로 조선을 병탄하기 위한 일본 주도의 선제적 조치로써 조선의 식민지화를 위해 먼저 조선에 일본식 법제를 강제로 적용하려는 목적으로 강행된 것이었다. 즉, 조선 식민지화의 토대를 쌓기 위한 일제의 사전 공작이었던 것이다. 일본은 이미 1876년 강화도 침략부터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으며, 사실상 '갑오개혁'에 의해 그 목적은 상당 부분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갑오개혁'이라는 용어 자체가 완전히 잘못된 용어다. '갑오개혁'이라는 용어가 처음 출현한 것은 일제 강점기 말인 1944년 경성제국대학 교수 다보하시 기요시(田保橋潔)가 '근대조선에서의 정치적 개혁'이란 논문에서다. 그는 이 '갑오개혁'에 대하여 "전쟁의 긴박 속에 개혁 필요성을 자각한 조선 관료의 혁신 분자들이 일본 정부의 전면적 원조를 얻어 메이지 유신의 홍업(鴻業, 대업)을 본받아 500년 구체제를 타파하고 근대국가의 모습을 정비하려 기도한 사업"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일본 제국주의가 경복궁을 침략하여 점령하고 고종을 감금한 채 일본 앞잡이 내각을 내세워 강행한 것을 '개혁'이라 부르는 것은 민족사의 수치다. 정확히는 '왜란'이며 최소한 '정변'이다.
'갑오개혁'에 의해 검사(개념)가 출현했다는 것은 그리 내놓고 자랑할 일이 결코 아니다. 갑오개혁에 의한 '재판소구성법'과 1895년 3월 '평리원(平理院, 고등재판소) 검사국' 설치로 검사라는 개념이 도입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의 명칭이 '고등법원 검사국'으로서 법원에 검사가 소속하는 특이한 조직 형태 그리고 동일한 범주의 명칭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갑오개혁 때의 '평리원 검사국' 제도가 결국 100% 일본식이라는 것이 역설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재판소구성법' 역시 일본의 '裁判所構成法'이란 명칭을 그대로 따온 것이다.
또한 '갑오개혁'의 '관제 개혁'에 서기관을 비롯하여 사무관, 주사, 서기 등 새로운 관제에 의한 "순수 일본식 직급과 그 명칭"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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