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G 아니라고? 거인-소인 한 장면에 등장시킨 감독의 패기

김성호 2024. 7. 18.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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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785]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세이브어스>

[김성호 기자]

거인과 소인의 이야기는 인간의 오랜 관심이었다. 영화가 태동하기 전에도 수많은 문학이 그를 다루었다. 문학 전에도 설화와 전설, 신화 속 거인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거인족과 올림푸스 신들의 전쟁이 있었고, 그때 살아남은 올림푸스와 같은 거인은 지구를 떠받치는 형벌을 받았다고 했다. 외눈박이 퀴클롭스가 트로이 전쟁 뒤 귀환하는 오디세우스를 쫓다 저주를 퍼붓는 장면은 저 유명한 서사시 <오디세이아>의 빼놓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때로는 호기심을 자아내는 인간의 친구로, 또 때로는 처단해야 할 과거의 유물로써, 일대 전쟁을 치러야 할 상상 속 악당으로 인간은 거인을 그려왔다. 이따금 거인이 인간에게 친근하게 다가설 때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은 작은 이들의 세상을 돌보지 않는 파괴적인 무엇으로 그려질 때가 많다.

단적으로 인간보다 훨씬 작은 인간을 등장시킨 작품들이 그를 잘 보여준다. 소인국을 여행할 때의 <걸리버 여행기>나, 요정이 등장하는 <마루 밑 아리에티> 같은 작품은 거대해진 인간과 작은 인간 아닌 존재, 또는 소인들을 대비해 우리의 섬세하지 못함을 내비치기도 한다. 물론 그보다는 크고 작은이들의 직접적 대비로써 극적 재미를 취하는 게 먼저일 수 있겠으나 말이다.
  
▲ 세이브어스 스틸컷
ⓒ BIFAN
 
거인과 소인의 위태로운 공존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엑스라지11에 묶인 <세이브어스>는 거인과 소인이 함께 있는 세계를 그린다. 인간의 형체를 했으나 거인과 소인은 확연히 구분된다. 거인의 발바닥 크기만도 되지 못하는 소인들은 거인에게 치이기 일쑤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 인간보다 많은 개미가 있다 해서 그들이 위협이 되지 않듯이, 소인에게 거인은 위협이지만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

거인들의 세상에서 소인들은 소인 거주구역에 갇혀 살아가는 신세다. 법으로 거인이 나다닐 수 없게 해놨다곤 하지만 소인들의 마음이 평안할 리 만무하다. 거인이 지나갈 때마다 대지가 울리고 집도 흔들흔들 할 정도니 말이다. 마음 편히 거리를 나가기도 어렵다. 거인이 실수로 발을 헛디디면 소인쯤은 쫙 누린 어포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뿐인가. 거인들의 필요에 의해 거주구역에서 밀려나고 다른 곳으로 옮겨질 수 있다는 불안도 적잖다.

소인에겐 여전한 위협일 밖에 없는 공존이다. 허울뿐인 공존을 끝내고 속 편히 살자는 소인이 마침내 등장한다. 다지(이유진 분)가 바로 그녀다. 그녀에겐 거인을 척살하고 소인들의 세상을 만들겠단 목표가 있다. 소인 가운데 동지를 모아서는 거인들을 물리치자는 계획을 짜기에 이른다. 어느 카페인가 술집인가에 모여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게 그 시작. 그러나 거인들의 세상을 오래 겪어온 이들에겐 어딘지 모를 주눅 든 태도가 있다. 모임은 결렬.
 
▲ 세이브어스 스틸컷
ⓒ BIFAN
 
거인을 처단하겠단 혁명적 결단

그렇다고 포기할 다지가 아니다. 혼자서라도 어떻게든 거인을 처단하기로 결심한다. 작업실에 들어간 다지는 웬만한 공격으론 꿈쩍하지 않을 거인을 죽이기 위해 특별한 무기를 제작하는 데 몰두한다.

다지가 거인을 처단하겠다 나선 것은 오로지 저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동식물을 죄다 해치우고, 숲이며 바다를 파괴하고, 급기야 소인들까지 죽게 하는 거인들을 물리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지는 지구와 환경 전체를 위해 그 적인 거인을 제거하려 든다.

다지의 노력이 나름의 성과를 발휘하며 영화는 한 단계 더 전진한다. 처음의 뜻은 뭉개지고 변질된다. 거인에게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만큼 다지는 거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되어간다. 영화는 나름대로 준비한 결말로써 그를 효과적으로 응징한다.
 
▲ 세이브어스 스틸컷
ⓒ BIFAN
 
지구를 위협하는 인간을 떠올리며

거인과 소인의 대비를 수많은 작가가 수없이 되풀이해 활용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속과 종, 아종 안에 홀로 남은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현실을 돌아보기 위해서일 테다. 현생 인류, 즉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에렉투스, 데니소바인이 사라진 자리에 홀로 남아 살아 있다.

여우가 속 안에 사막여우, 붉은여우, 은빛여우, 그밖에 수많은 아종들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해, 인간은 오로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하나뿐이다. 나머지가 어떻게 되었냐고? 수많은 연구는 우리 손으로 다른 아종들을 사냥하여 멸절시켰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홀로 남은 인류는 무려 인구수 80억 명을 돌파해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홀로 남아 비대해진 인류가 온 지구를 위협한다. 지구 온난화는 기상이변을 불러오고, 세계 곳곳에서 이어지는 기후소송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실효성 있는 수준의 탄소배출 감축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기업이 탄소배출권을 거래해 친환경 마크를 달고 마케팅에 나서는 이면에는 조성된 삼림을 돌보지도, 그 파괴를 감독하지도 않는 무력한 제도가 자리한다. 친환경 에너지를 말하면서도 석유를 놓을 수 없도록 하는 패권전쟁과, 생물종 다양성이며 자연의 재생능력을 위태롭게 하는 자본주의 소비체제가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혹자는 이를 가리켜 소년이 램프에서 불러낸 거인을 다루지 못하는 꼴이라 이야기하고, 또 다른 이는 먼저 몸집을 키운 거인들이 뒤를 따르려는 소인을 억압하는 꼴이라고 불평한다. 이 모두가 사실과 다르다고 할 수 없어서 인간은 오늘보다 나은 미래로 쉬이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포스터
ⓒ BIFAN
 
단순하지만 패기 있는 시도

인하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김어진 감독은 CG가 아닌 원근법 촬영 등을 통하여 거인과 소인을 한 화면 안에 담아내는 단순하지만 패기 있는 시도를 선보인다. 그 자체로 유머와 상상, 나름의 주제의식이 끼얹어져 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7분여의 짤막한 단편 가운데 각별히 훌륭한 무엇이 있다고 꺼내어 이야기하긴 어렵지만, 흔한 설정으로 유의미한 이야기에 도전했음은 분명하다.

거인과 소인의 싸움이 저 성경 속 다윗과 골리앗의 반전이 기약된 결투로부터 <걸리버 여행기>의 다채로운 상상을 지나 어느덧 홀로 남은 인류와 그 절멸의 상징을 품어낸 이야기로 진화할 때가 되었음을 이 영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은 이미 선을 넘어섰다. 아종을 죄다 멸절시킨 내면의 무엇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거인을 물러나게 한 소인의 비극처럼 좋지 못한 결말을 맞이할 밖에 없는 일이다.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아직 미숙한 부분이 적잖은 이 영화를 공식 초청해 엑스라지 11번째 섹션에 묶어 상영한 데는 <세이브어스>가 지닌 이 같은 유효함이 영향을 미쳤을 테다. 인간은 다른 누구를 처단하기 이전에 스스로를 극복하여야 한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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