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ㆍEU 규제 동력 ‘소비자 보호’…한국 법은 여전히 ‘반쪽짜리’

윤상언, 권유진 2024. 7. 1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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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자산 분야에 양심적인 기업이 많지만, 규제가 불명확한 환경에서는 기업 간 경쟁이 과열돼 소비자 보호가 뒷전이 될 우려가 큽니다.”

지난달 18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중앙일보와 만난 블록체인업체 체이널리시스의 제이슨 소멘사토 북미정책총괄은 이 같이 말했다. 블록체인 사업자 입장에서도 건전한 시장을 조성해 줄 규제가 필요하다는 취지. 그는 “가상자산 기업과 소비자가 피해입지 않으려면 올바른 규제 체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블록체인 분석업체 체이널리시스의 제임스 소멘사토 체이널리시스 북미정책 총괄이 지난달 18일 워싱턴DC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 만났다. 사진 윤상언 기자

국내에선 오는 19일 가상자산을 제도권 내에 포섭하는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하 가상자산 이용자보호법)이 처음으로 시행된다. 가상자산 사업자의 자금을 공신력 있는 은행에 예치금으로 보관하게 하고, 비정상적인 가격 변동 등 불공정거래를 금지하는 내용 등을 담았다. 업계에선 글로벌 규제 흐름을 봤을 때 속도 면에서는 뒤쳐지지 않았으나 지난달 30일 유럽에서 시행된 ‘가상자산시장에 관한 법률(MiCA)’ 등과 비교했을 때 정밀함이나 완결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가상자산 전체를 규율하는 업권법은 당초 두 단계로 나눠서 입법하도록 계획됐다. 법안 통과까지 걸리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소비자 보호와 관련된 1단계 법(가상자산 이용자보호법)부터 통과시키자는 것. 2단계 법안에는 가상자산 사업자 공시 등 산업 생태계를 규제할 수 있는 내용을 담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1단계 법안부터 빈틈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조정희 법무법인 디코드 대표변호사는 “현재 가상자산 이용자보호법은 소비자 보호를 위해 강력한 형사처벌 근거를 만들었지만, 정작 어떻게 사업을 해야할지에 대해선 내용이 없다”며 “사업자가 잘못했을때 과징금과 영업정지 등 처벌을 내릴 근거가 부족해 소비자 보호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김영희 디자이너


더 큰 문제는 현재로서 2단계 입법이 요원하다는 점이다. 국회 상황을 보면 추가 입법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해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가상자산 관련 법안을 발의하거나 주도하던 윤창현 전 국민의힘 의원과 김병욱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은 이번 22대 국회에 입성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해왔던 논의를 다시 처음부터 해야할 가능성이 높다. 익명을 원한 가상자산 업계 관계자는 “가상자산에 대한 관심은 높지만, 2단계 입법을 적극 추진하려는 의원은 아직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업계에선 또 다른 문제도 지적하고 있다. 국내 가상자산 거래소에 기관투자자의 투자가 없다는 점이다. 법인과 기관이 가상자산 투자를 하려면 법인 명의의 가상자산 실명계좌가 필요하지만, 별다른 제한 사항이 없음에도 은행들이 금융 당국 눈치를 보느라 이를 발급해주지 않는 ‘그림자 규제’가 있다는 주장이다. 개인투자자만 참여할 경우 과도하게 알트코인(비트코인을 제외한 가상자산) 거래량이 늘어나는 등 시장이 혼탁해질 수 있다. 김민승 코빗리서치센터장은 “전문 자산운용사 등 기관투자자 없이 개인 투자자만 남아있으면 투기성 매매 등으로 가격왜곡이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6월 국회에서 열린 제407회 국회(임시회) 제7차 본회의에서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안이 통과되고 있다. 뉴스1

EU에선 “규제, 위협 아닌 기회”


유럽연합(EU)이 발빠르게 MiCA를 시행한 데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시장을 제도권에서 외면한다면 소비자들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있다. 시장 규칙이 명확해야 건실한 사업자들이 시장에 들어오고, 소비자들도 안심하고 투자에 나설 수 있다는 것. 유럽의 가상자산 전문 밴처캐피탈(VC) 그린필드의 크리스티안 짐머만 최고법률책임자(CLO)는 “가상자산 시장에는 기관과 소비자의 대규모 유입이 필요하다”며 “규제가 만들어져 이를 준수하고 상대방도 지킬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시장도 클 수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유럽 의회 의사당. EPA=연합뉴스


규제 환경이 조성되면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말아야할 것이 명확해지고 장기적으로 혼선도 줄어들 수 있다. 현재 규제를 만들고 있는 국가들이 이를 참고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MiCA는스테이블 코인(달러 같은 법정화폐 등에 연동하는 방식으로 가격 변동성을 최소화한 가상자산)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설정하고 있다. EU 27개 회원국 내에서 발행 및 운영사가 특정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EU 전체 활동까지 제한할 수 있다. 짐머만 CLO는 “스테이블코인 관련 미국에서도 비슷한 규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MiCA의 기준을 준수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 모든 것들을 멀리했다”고 말했다.


규제 요구 커지는 미국


지난달 미국 워싱턴DC에 위치한 미 증권거래위원회(SEC) 건물의 전경. 윤상언 기자

최근 가상자산 규제 법안을 만들고 있는 미국에서도 소비자 보호 목소리가 높다. 미국은 당초 규제보다는 소송을 통해 시장 질서를 만드는 편을 선호했지만, 최근엔 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헤스터 퍼스 SEC 상임위원은 지난달 18일 “SEC는 주로 가상자산 산업에 강력한 규제를 집행해오기만 했는데, 이 외에 다양한 방법으로 소비자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명확한 소비자 보호가 가상자산 산업 발전의 토대라는 업계 주장도 있다. 미국의 가상자산 발행업체 리플의 스튜어트 알데로티 최고법무책임자(CLO)는 “미국에서도 가상자산 규제가 명료해질수록 기업들이 더 큰 투자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리플은 미국의 가상자산 발행업체다. 로이터=연합뉴스


“입법 공백 메울 방법도 찾아야”


국내에서는 2단계 입법에 속도를 내는 동시에, 금융 당국이 규제 샌드박스 등의 방법으로 입법 공백을 메울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가상자산 분야 전문가인 이한진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법률을 만들려면 사회적 합의 과정이 오래 걸린다”며 “규제 샌드박스 등을 통해 가상자산 분야에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는 방법도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DC, 뉴욕(미국)=윤상언 기자, 권유진 기자 youn.san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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