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에 발각된 아마추어 첩보전…국정원 요원 결제정보도 노출
“해당 기간 동안 피고인은 등록하지 않은 채 사실상 한국의 요원(an agent of the ROK)으로서 활동했다.”
미 연방 검찰은 미국 내의 대표적 한반도 전문가이자 지한파로 손꼽혀온 수미 테리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을 기소하며 그가 한국 국정원의 정보 요원에 준하는 활동을 한 것으로 규정했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미국 주재 공관에서 근무 중인 국정원 요원들로부터 고가의 명품 가방 및 의류, 고급 레스토랑에서의 식사 등을 수차례 제공받았다고 검찰은 설명했다.
국정원이 동맹국인 미국에서 벌여온 해외 첩보 수집 활동의 구체적 내용과 부적절한 관행이 공개되면서 외교적으로도 적지 않은 파장이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금품으로 손쉽게 정보원을 포섭하고 당장 급한 정보를 끌어모으거나 단편적으로 활용하는 데 급급할 뿐 주재국 상황 등을 고려해 정교하게 관리하지 못하는 국정원의 구태의연한 아마추어적 첩보 활동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라고 지적한다.
17일 중앙일보가 입수한 뉴욕 남부지방검찰청의 공소장에 따르면 테리의 한국 정부 대리 활동은 지난 2013년부터 10여년 간 이어졌다. 미국 외국대리인등록법(FARA)에 따르면 외국 정부 등을 대리해 활동할 경우 법무부 장관에게 반드시 신고해야 하지만, 테리는 이런 규정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신고를 누락했다. 그는 2016~2022년 사이 최소 세 차례의 의회 증언을 위해 선서하는 과정에서 ‘FARA에 따른 신고 대상’인지 묻는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했다.
공소장에 따르면 테리가 한 활동에는 한국 정부의 입장을 사실상 대변하는 언론 기고 및 발표를 하거나 접근이 쉽지 않은 인사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것도 포함됐다. 미 정부 관료와의 비공개 모임 등에서 획득한 정보를 넘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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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美정부 대담 넘기고 명품 가방 받아
테리는 이런 활동을 한 뒤에는 국정원으로부터 금품을 수수했다. 공소장에 나열된 품목은 2845달러짜리 돌체 앤 가바나 코트, 2950달러짜리 보테가 베네타 핸드백, 3450달러짜리 루이비통 핸드백 등이다. 또 테리가 근무 중인 연구기관 프로그램을 위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기금 계좌로 3만 7000달러 상당을 수수했다고 검찰은 설명했다.
눈길을 끄는 건 검찰이 공소장에서 테리의 활동을 지시한 국정원 담당 요원(handler) 등의 직급까지 구체적으로 공개한 점이다. 10여년 간 테리를 관리한 담당 요원은 3명으로, 뉴욕에 있는 유엔 대표부의 공사와 워싱턴 DC에 있는 주미 대사관의 공사참사관 2명이라고 공소장에 적시됐다. 이들은 신분을 “외교관으로 위장(under diplomatic cover)”했다면서다.
테리는 조사 과정에서 자신을 담당하는 주미 대사관의 요원을 “국정원 지부장”으로 표현했는데, 통상 국정원 1급이 파견되는 정무2공사를 뜻하는 것일 수 있다. 이들이 테리와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모습, 명품샵에서 물건을 산 뒤 계산하는 모습 등을 담은 폐쇄회로(CC)TV 화면까지 공소장에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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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대사관 국정원 공사 적시…미측 불쾌감 반영
실명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한국의 외교 대상인 워싱턴 조야의 주요 인물이라면 근무 시기와 직급을 통해 충분히 어떤 사람인지 특정할 수 있을 정도의 정보가 공소장에는 모두 담겼다. 외교관 직함으로 해외에서 활동하는 이른바 ‘화이트 요원’을 노출시킨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이는 곧 향후 주미 공관에서 벌이는 정상적인 외교활동도 영향을 받을 우려가 있다는 뜻이다. 미 연방 검찰의 이런 세부적 정보 공개 자체가 국정원이 미 본토에서 벌인 첩보 활동의 부적절성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낸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실제 공소장에 나온 테리의 혐의를 보면 미국 정부는 물론이고 의회, 연구 기관에서도 불쾌해할 만한 내용이 다수 담겼다. 대표적인 게 2022년 6월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을 만난 뒤 테리가 내용을 국정원 담당 요원에게 넘긴 것이다.
당시 모임은 한반도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과 의견을 나누는 목적으로 마련된 것으로, 블링컨 장관과 국무부 고위 관료 외에 테리를 포함한 학자 5명만 참석했다. 원칙은 내용을 외부로 유출하지 않는 ‘오프 더 레코드’였다.
하지만 테리는 국무부 청사를 나서자마자 국정원 담당 요원을 만났다. 요원은 테리를 차량에 태웠고, 차 안에서 테리가 모임 중 적은 두 장짜리 메모를 휴대전화 사진으로 찍었다. 검찰은 이 사진도 공소장에 첨부했는데, 배경을 통해 차량 내부임을 알 수 있고 메모 옆에는 테리의 ‘퀼팅 토트 백’도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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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요원들, '외교 번호판' 차량서 정보 넘겨받아
이런 활동이 이뤄진 건 외교 번호판을 단 주미 대사관 등록 차량 안에서였다. 미 정부 입장에선 한국 국정원 요원들이 정보원을 이용해 미 고위 각료와의 비밀 면담 내용을 버젓이 외교 차량 안에서 빼낸 게 된다. 테리는 조사 과정에서 모임 사실을 이미 사전에 국정원 담당 요원에게 알렸다고 시인했다.
같은 해 7월 테리는 한 레스토랑에서 ‘해피 아워’를 진행하며 다양한 의회 보좌진을 초청했다. 명목상으로는 주미 대사관이 주최하는 것이었지만, 돈은 테리의 국정원 담당 요원이 냈다. 그 역시 해피 아워에 참여했는데, 아무도 그가 국정원 소속이란 것은 알지 못했다.
검찰은 이런 자리가 정보 기관의 ‘spot and assess(식별 및 평가)’ 공작에 활용될 수 있다고 지적했고, 테리 역시 조사 과정에서 이를 시인했다. 식별 및 평가는 사교 행사 등 자연스러운 자리를 통해 ‘잠재적 고가치 표적’을 찾아내는 정보 기관의 전형적인 포섭 수법이다.
공소장은 테리의 대언론 활동 등도 구체적으로 밝혔는데, 한국 정부의 대외 정책과 관련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지난해 1월 국정원 담당 요원은 테리와 식사하며 윤 정부의 확장억제 강화에 대한 바람과 핵협의그룹(NCG) 창설 필요성, 미국 핵 전략자산의 활발한 전개 필요성 등을 설명했다. 테리는 이후 거의 같은 내용을 기고 등에서 소화했다.
테리는 조사에서 자신에게 NCG라는 개념을 처음 이야기해준 것 자체가 국정원 담당 요원이었다고 시인했다. 테리는 기고를 내기 전 사전에 내용을 국정원 담당 요원과 공유하기도 했다.
비슷한 즈음 두 사람은 저녁 식사를 하며 이런 활동에 대한 사실상의 보상 방안도 논의했다. 테리가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기부하는 형식이었다. 국정원 담당 요원은 “가장 좋은 방법은 대사관 명의의 수표를 끊어주는 것”이라며 “복잡하게 3자를 거치지 말고 곧바로 하는 게 더 좋다”고 말했다. 그러자 테리는 “3자를 끼워넣어야 한다”고 했다. 한국 정부에서 곧바로 거액을 입금한다면 “의심스러워보일 수 있다”는 이유였다.
윤 대통령의 2023년 4월 국빈 방미를 앞두고 이뤄진 활동도 공소장에 드러났다. 대통령 방미 직전 이뤄진 한·미 싱크탱크의 동맹 관련 학술대회를 위해 테리가 소속 연구기관에서 움직였는데, 국정원 담당 요원은 이후 테리에게 2만 6035 달러를 지급했다.
FBI의 압수수색 결과 테리와 해당 국정원 담당 요원은 2022년 10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 약 100차례 이상 암호화 어플리케이션을 이용해 통화했다. 이들은 코로나19 확산으로 외부 활동이 제한되던 2020~2021년에도 정기적으로 수차례 만나 식사 등을 했다.
공소장에는 외교부 관료도 3명 등장한다. 이 중 한 명은 테리에게 윤 대통령의 국빈 방미 관련 동맹 강화에 긍정적이라는 메시지를 담은 기고를 요청하고, 500달러 지급을 약속했다.
NCG 출범을 핵심으로 하는 확장억제 강화 등은 윤 정부가 한·미 동맹의 최대 성과로 꼽는데, 뒤에서 미국 검찰이 불법으로 규정하는 국정원의 공작이 있었다는 뜻으로도 읽힐 여지가 있다. 테리가 간첩 행위로 기소된 것은 아니지만, 한국 정부가 미국의 현행법에 저촉되는 부적절한 방식으로 ‘외국 정부’로서의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게 미 검찰의 인식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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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한·미 정보 당국 긴밀히 소통 중"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의 파장을 우려한다. 학자적 양심과 독립성을 지키며 목소리를 내는 미국 내 지한파의 활동이 위축되는 결과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남성욱 고려대 통일융합연구원장은 “CIA에서 한국 업무를 맡았던 테리와 물건을 주고받는 증거까지 잡힐 정도로 활동했다는 것은 우리 정보요원들에게 큰 경각심을 주는 사건”이라며 “이제 정보 활동도 시대에 맞게 달라져야 하고, 과거처럼 1차 방정식 수준의 활동은 이제 설 자리가 없다”고 지적했다.
한 전직 국정원 간부는 “주재국에서 자신의 행적을 숨겨야 하는 정보요원의 기본이 지켜지지 않은 사례로 남을 것”이라며 “이를 반면교사 삼아 국격과 변화된 정보환경에 맞는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국정원은 이날 "외국대리인등록법 기소 보도와 관련해 한·미 정보당국은 긴밀히 소통 중에 있다"고 밝혔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정영교 기자 chung.yeong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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