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매력없어…할 건 이자장사뿐" 외국은행 11곳 韓 떠났다 [엑시트 코리아]
17일 부산 중앙동에 위치한 야마구치은행의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1986년 부산에 지점을 설립하며 한국에 들어온 이 은행은 지난달 말 국내 영업을 종료했다. 현재는 한국·일본인 직원 소수가 남아 사무실을 정리하고 있다. 야마구치은행 관계자는 “주택·전세·신용대출 위주의 한국 시장에서 일본계 은행으로서 수익을 내는 게 어려웠다”며 “특히 글로벌 금융허브로 키운다는 부산의 성장이 정체하면서 외국계 은행의 생존도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금융감독원 금융통계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013년 이후 한국에서 철수를 결정한 외국계 은행만 11곳에 달한다. 한국에 지점을 두고 영업 중인 외국계 은행은 33곳 남았다. 영국의 빅4 은행 중 하나인 바클레이스 은행은 2017년 한국에서 은행 영업을 접었고, 2020년엔 캐나다 3위 은행 노바스코샤은행이 서울지점의 문을 닫았다.
금융규제에 먹거리도 적어
그나마 한국에 있던 은행도 그 규모를 줄이고 있다. 국내 지점이 11곳에 달했던 홍콩상하이은행(HSBC)의 한국 지점은 이제 1곳(서울)밖에 남지 않았다. 한국씨티은행은 소비자금융 사업에서 철수하고 기업 금융 위주로 운영한다. 2013년 말 57개에 달했던 외국계 은행의 국내 지점 수는 이젠 총 39개로, 31.6%(18개) 감소했다.
메릴린치 한국 공동대표를 지낸 이남우 연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외국계 은행이나 증권사 모두 한국을 매력이 없는 시장으로 보고 있다“며 ”성장률이 지체된 상황에서 이자 장사 외에 뚜렷한 먹거리가 없다. 한국 주식 역시 선진국 수준의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외국은 고액자산가의 자산관리(WM)가 보편화 돼 있지만 한국은 그마저도 지지부진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금융당국의 과도한 개입과 규제도 ‘엑시트 코리아’의 원인으로 꼽힌다. 예컨대 정부는 지난해 11월부터 상장 주식에 대한 공매도를 전면 금지했다. 선진국 주식시장에서 공매도를 금지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최근 크레디트스위스(현 UBS)에 불법 공매도 혐의로 271억원의 과징금도 부과했다. 크레디트스위스 측은 금융당국에 ”외국에선 모두 허용되는 범위에서의 공매도 행위였다“고 주장했지만, "한국에선 불법"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국은 규제의 예측 가능성이 떨어진다는 게 외국계 은행의 인식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외국계 금융사 관계자는 “지난해는 이익이 많이 났다는 이유로 상생 금융에 횡재세 논란이 있었고, 올해는 홍콩 ELS 배상 등 금융당국의 압박이 잦다”며 “글로벌 본사에 한국의 규제를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데 애를 먹고 있다. 미국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아시아권과 비교해도 당국의 영향력이 센 편”이라고 말했다.
은행 업무용 전산망을 외부와 분리해야 하는 ‘망 분리’도 외국계 은행의 불편을 키우는 주요 규제 중 하나다. 망 분리로 인해 한국에서 영업 중인 외국계 은행은 본사 업무용 프로그램에 접속이 불가능하다. 한 외국계 은행 관계자는 ”본사와 소통을 해야 하거나 자료를 공유해야 할 때마다 이메일에 파일을 첨부해서 보내고 받는다“며 ”효율성 측면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고, 망 분리 규제를 하는 나라도 거의 없다“고 말했다.
높은 세율도 부담을 키운다. 한국의 법인세 최고세율은 24%로 싱가포르(17%), 홍콩(16.5%) 등 아시아권 금융 허브와 비교해 월등히 높다. 고소득자의 소득세 부담도 상대적으로 크다 보니 금융회사는 물론 금융권 종사자 역시 한국 거주를 꺼리는 분위기다. 앞서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한국이) 금융 허브가 되려면 금융 규제 완화 차원이 아니라 세제 등 인프라가 종합적으로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했다.
싱가포르는 금융 중심지로 규모 키워
정부는 서울을 홍콩·싱가포르 같은 아시아 금융의 중심지로 키우겠다며 2003년 동북아 금융허브 로드맵을 수립했다. 핀테크 기업에 대한 지원 강화와 외환시장 개장시간 확대 등이다. 그러나 싱가포르와의 격차는 좁혀지지 않고 있다. 싱가포르는 자본이득이나 양도소득에 대해서는 과세를 하지 않는 데다 영국·캐나다 등 전 세계 100여개 국가와 원천소득에 대한 이중과세 방지 조약까지 체결했다. 외국계 금융사와 임직원을 빨아들이기 위해 전체 인프라를 동원하는 셈이다.
백준승 전 피델리티자산운용 애널리스트는 ”최근 글로벌 금융회사의 아시아 거점이 싱가포르로 대거 옮겨갔다“며 ”싱가포르는 규제가 거의 없고 정책이 갑작스럽게 바뀌는 일이 없어 예측 가능성도 높다. 법인세나 소득세율 모두 낮아 금융권의 인센티브가 확실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국이 이 같은 싱가포르의 특징을 따라가고, 주식 시장도 선진국 수준으로 평가받는다면 오지 말라고 해도 외국 금융사가 들어올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국 주식 보유액 5년간 12.6배 늘어
한국을 떠나는 건 은행만이 아니다. 코스피·코스닥 등 한국 주식에 투자하던 동학 개미는 서학 개미로 옷을 갈아입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난 15일까지 개인 투자자는 유가증권시장에서 11조3157억원을 순매도했다. 같은 기간 이들의 미국 주식 순매수 규모는 78억2126만 달러(약 10조8400억원)에 달한다.
미국 주식에 대한 투자 수요가 급증하다 보니 이달 들어 국내 투자자의 미국 주식 보유액은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한국예탁결제원 증권정보포털에 따르면 12일 기준 국내 투자자는 미국 주식을 총 932억5065만 달러(약 129조1500억원)를 보유한 것으로 집계됐다. 7월 말 기준 미국 주식 보유액은 5년 전인 2019년엔 73억8933만 달러로, 지금에 10분의 1에도 못 미쳤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이코노미스트는 “미국 S&P500과 나스닥 지수 모두 올해만 사상 최고치를 여러 번 갈아치울 정도로 상승세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며 “반면 국내 주식은 연중 최고치 수준에 머물고 있다. 수익률 차이를 고려할 때 미국 주식으로 옮겨가는 걸 합리적이라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정부가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발표하긴 했지만 세제 혜택 규모가 크지 않은 데다 상속세, 금융투자소득세 등 주요 세목의 불확실성이 커 주가를 올리는 효과가 크지 않았다는 게 시장의 평가다.
정진호 기자 jeong.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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