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기의 시시각각] 트럼프 머리에 한국은 입력됐을까

김현기 2024. 7. 18.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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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럼프 본능만큼 신속했던 주요국
우린 7시간 넘게 지나 늦장 메시지
'트럼프 관리' 소홀히 할 이유 없어

김현기 논설위원

#1 재능은 본능을 이기지 못한다. 이성도 본능을 앞서지 못한다. 이번 미국 대선도 두 명의 본능이 판도를 뒤흔들었다.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후보, 그리고 AP통신 에반 부치 사진기자다.

먼저 트럼프. 그는 총소리가 난 순간 잽싸게 연단 아래로 몸을 숨겼다. 그는 뉴욕군사학교 출신이다. 그 DNA가 살아 있었다. 나이 78에 대단한 순발력, 체력이다. 그리고 이어진 세 차례의 'fight'(싸우자) 외침. 주먹 쥔 오른손을 높이 치켜든 본능은 기력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바이든 대통령이었으면 어땠을까. 아마 경호원에게 업혀 가거나 기절하지 않았을까. 트럼프 1기 워싱턴 특파원으로 있으면서 썼던 글을 찾아 보니 '파괴 본능' '막말 본능' 등 수많은 본능을 트럼프에 수식어로 달았다. 물론 부정적 묘사였다. 5년이 지난 이제야 알았다. 그 모든 걸 뛰어넘고도 남는 천부적 '정치 본능'이 트럼프에게 있다는 걸.

지난 13일 오후(한국시간 14일 오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버틀러시에서의 대선 유세 중 총격을 당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경호요원들에 둘러싸여 연단을 내려오면서 지지자들을 향해 주먹을 쥐어 보이고 있다. AP통신의 에반 부치 기자가 찍은 사진이다. AP=연합뉴스


2021년 퓰리처상을 받았던 부치의 본능도 극적이었다. 혼란스러운 현장임에도 사진 구도가 완벽했다. 사진에서 가장 안정적 구도는 삼각형이다. 부치는 트럼프가 치켜든 오른손 주먹을 정점으로 아름다운 삼각형을 잡았다. 밑에서 직접 앵글을 잡아 웅장함도 있었다. 행운이겠지만 역광이 아닌 순광이라 파란 하늘이 선명하게 성조기와 대비됐다. 다른 사진기자도 같은 위치에 있었지만 그들은 카메라를 치켜올린 채 셔터만 눌렀다. 세기의 사진과 그저 그런 사진은 그렇게 갈렸다.

#2 총격 사건이 일어난 건 오전 7시5분(이하 한국시간). 첫 메시지를 낸 건 스타머 신임 영국 총리였다. 두 시간 만인 오전 9시15분에 "충격적인 장면에 경악했다. 어떠한 형태의 폭력도 용납할 수 없다"는 글을 SNS에 올렸다. 이어 호주(오전 9시28분), 일본(오전 9시59분)의 정상이 뒤를 이었다. 다른 주요국 정상들도 대체로 비슷한 시간대에 움직였다.
그런데 우리 대통령실의 대처는 이상하리만큼 늦었다. 미국 시각 기준으로 날짜가 바뀌어 다음 날 새벽(오후 2시38분)이 돼서야 윤석열 대통령의 메시지를 SNS에 띄웠다. 트럼프가 300㎞ 떨어진 뉴저지주 공항에 내리는 영상이 공개되고도 또 1시간이 지난 뒤의 늦장 대응이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주요 매체 관련 기사에도 한국은 빠졌다. 기억, 인내심의 한계가 모두 짧은 트럼프의 머릿속에 윤 대통령의 메시지는 아마 미입력 상태일 것이다.

영국 스타머 신임총리와 윤석열 대통령이 트럼프 총격사고 후 테러행위를 규탄하고 트럼프 전 대통령의 쾌유를 기원하는 메시지를 SNS에 올렸다. 왼쪽 스타머 총리는 한국시간 14일 오전 9시15분, 오른쪽 윤 대통령은 오후 2시38분에 올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엑스(X) 캡처


그럼 왜 그랬을까. 우선 바이든의 눈치를 본 것이라면 큰 오산이다. 트럼프는 '동맹이다, 뭐다'가 아닌 지도자와의 1대 1 관계를 가장 중시한다. '돌다리를 두들겨보고도 건너지 않는다'란 말이 있을 정도로 신중한 일본이 기민하게 움직인 건 다 이유가 있어서다. 게다가 특별히 트럼프 편을 드는 내용도 아닌 테러를 규탄하는 평범한 메시지다.
또 하나, 만약 휴일 오전인 데다 대통령 행사 때문에 대응이 늦었던 것이라면 심각한 기강 해이다. 세 문장짜리 짧은 메시지를 내는 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 일인가. 대통령실, 외교부 모두 참으로 본능도, 재능도 없다.

#3 미 대선이 이미 트럼프의 승리로 기울었다는 주장엔 동의하지 않는다. 두 가지 이유다.
첫째, 미 대선은 결국 보수·진보 진영의 투표율이 결정적 변수다. 이번 총격 사건으로 보수층이 결집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위기를 느낀 민주당 지지층이 더 결집할 수도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AFP=연합뉴스


또 하나는 '10월의 이변'. 미 대선을 보면 늘 11월 투표일 직전에 대형 돌발 변수가 터졌다. 2016년에는 미 연방수사국(FBI)의 '힐러리 e메일 스캔들' 재수사가 발표되면서 판세가 180도 뒤집혔다. 2020년에는 트럼프의 코로나 감염이 결정타가 됐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트럼프 챙기기'를 소홀히 해야 할 이유는 없다. 안 그래도 윤 대통령이 바이든과의 의리를 너무 중시해 밑의 사람들이 움직이기 어려워한다는 소문이 벌써 워싱턴과 외교가에 파다해 하는 얘기다. 외교에서 의리는 실리를 이기지 못한다.

김현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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