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민의 퍼스펙티브] “종교를 넘어 상처받은 사람들이 찾는 성지로 가꿀 것”
‘힐링의 성지’ 남양성모성지 건립의 주역 이상각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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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인박해 희생자들의 순교지, 치유와 평화의 공간으로 재탄생
돈 없었지만 월 2만원 내는 3만명 후원으로 대성당 기적 이뤄
“하느님 일은 시작하면 되더라”…세계적 건축가들 흔쾌히 동참
재원문제 등으로 티 채플은 미완, 제작 전시·크라우드펀딩 계획
」
세 사람의 신념과 의지가 공명하며 불가능한 일을 현실로 이뤄내고 있다. 힐링의 성지라는 입소문을 타고 미사·명상·산책객이 밀려들고 걸작 예술품을 즐기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2022년 이후 지금까지 18차례의 음악 연주회가 열렸고 오케스트라 공연 예약·문의도 쇄도하고 있다. 비극의 땅이 위안과 치유의 땅으로 부활한 것이다.
한국판 도원결의(桃園結義)는 2011년 시작됐다. 이 신부가 대성당 건축 의뢰를 위해 찾아갔을 때 마리오 보타가 물었다.
Q : 땅이 있나.
A : “없다.”
Q : 돈은 있나.
A : “없다.”
신부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보타가 말했다. “지금부터 모금하면 되지. 하느님의 일은 일단 시작하면 다 되더라. 당신이 천국에 갈 때 나를 위해 기도해달라.”
프랑스·스위스·이스라엘·중국 등에서 성당·이슬람사원·유대교 회당 등 종교 건축물 설계 경험이 많은 보타였다. 그는 직원들 인건비와 자재비 정도만 받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제안을 수락했다. 직접 현장을 둘러보고 여러 번의 설계 수정과 보완을 거쳐 2017년 착공된 성당은 2020년 완공됐다. 여기서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1시 미사가 봉헌되고 있다.
‘빛의 건축가’ 마리오 보타의 대성당
지난 15일, 경기도 화성의 남양성모성지를 찾았다. 주차장 입구에서 올려다보니 광활한 푸른 숲 언덕에 두 개의 붉은 원통형 타워가 우뚝 솟아있고, 그 주위를 유선형의 붉은 벽돌 건물이 감싸듯 자리 잡고 있었다. 52m 높이의 두 타워 사이에 간격을 둬 하단엔 채광창을, 상부엔 7개의 종을 수직으로 배열했다. 60만 장의 벽돌을 쌓아 올렸다는 성당 외벽이 주변의 싱그런 녹음과 조화를 이뤄 어릴 적 옛집마냥 푸근하게 다가온다. 소란했던 마음이 어느덧 고요해짐을 느낀다.
이 신부가 잠긴 문을 따고 취재진을 실내로 안내했다. 에어컨을 틀지 않았다는데도 30도를 웃도는 무더위가 무색할 만큼 실내는 서늘했다. “지속 가능하고 친환경적인 냉난방 시스템(열미로 공법)으로 비용 지출을 줄이기 위한 것”이란 설명이다. 첨단 공법보다 놀라운 건 대성당 안 제대 뒤편과 천장의 채광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빛이었다. 태양의 위치와 대기 변화에 따라 때로는 은은한 빛을, 때로는 한껏 펼쳐진 천사의 날개 같은 형상을 빚어내며 실내를 빛으로 수놓는다. “빛은 공간을 새롭게 창조하며 한계를 넘어 무한으로 이르는 신비를 뿜어낸다”는 보타의 철학이 이런 거구나 싶다. ‘빛의 건축가’ ‘영혼의 건축가’란 별칭이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성당 내 8개의 채플은 물론이고 신도석·사제 의자·성수대까지 보타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은 하나도 없다.
줄리아노 반지가 한국에 준 선물
여기에 또 한명의 예술 거장이 힘을 보탰다. 제대 중앙 윗부분에 걸린 십자가 예수상이다. 종래의 것과 달리 눈을 똑바로 뜨고 바람에 머릿결이 휘날리는 ‘살아있는’ 예수상이다. ‘20세기 미켈란젤로’라 불리는 이탈리아 조각가 줄리아노 반지의 작품인데, 보타의 소개로 합류하게 됐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방식에서 십자가의 못은 항상 고통이고 구속을 의미했는데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빛이다. 보잘것없는 철이나 못에 예수님이 구속돼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빛이 나오게 함으로써 십자가가 더는 죽음이 아닌 부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조각하고 싶었다”는 반지의 신념이 상징적으로 잘 구현됐다.
십자가상 양옆으론 성화 ‘최후의 만찬’ ‘수태고지’ ‘엘리사벳 방문’을 그린 유리 패널화가 천장에서 내려뜨려져 있다. 예수의 일생을 소재로 한 성화들인데, 이 역시 특이하다. 허름한 옷차림의 동양인이 등장하고 배신자를 향해 손가락질하거나 식탁 위에 엎드려있는 등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을 재해석한 독창적 그림이다. 유리 패널에 갈색목탄으로 형상을 그리고 채색했는데, 유리 뒷면에도 인물들의 뒷모습을 그려넣어 양면 관람이 가능하게 한 획기적 작품이다. 지난해 작품을 완성한 반지는 안타깝게도 올 3월 93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두 점의 패널화는 유작으로 미술사에 남게 됐다.
세계적 거장이 남긴 작품가격은 도대체 얼마일까. 이 신부의 답이다. “반지는 ‘친구를 위해 주는 선물이다. 재료 사고 세 명의 손주들에게 맛있는 것을 사줄 만큼의 돈이 남는다’며 놀라울 만큼 적은 금액을 받았다.” 이 신부의 말대로 “반지가 한국 교회에 준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남은 숙제는 페터 춤토르의 티 채플
40년의 사제 생활 중 35년을 성지 조성에 몰두해온 이상각 신부. 하지만 못다 한 숙제 하나가 남아있다. 페터 춤토르가 설계한 ‘티 채플’을 완성하는 일이다. 춤토르는 스위스의 산골 마을 발스 주민들의 의뢰로 온천장을 설계해 연간 14만명이 찾는 세계적 명소로 만든 건축계의 거장이다. 도심의 대형 빌딩이나 쇼핑센터 대신 주로 시골의 교회·요양원·미술관 등을 설계했는데 하나같이 예술 애호가들이 찾는 건축의 성지가 됐다. “돈을 얼마나 주느냐에 따라 일하지 않는다. 내가 진정한 흥미를 느껴야 일한다”는 다소 까다로운 건축가이기도 하다. 이 신부는 2012년 보타의 주선으로 스위스의 산골 할덴슈타인으로 춤토르를 찾아갔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성지를 짓는다”는 말이 춤토르의 마음을 움직였다. 기본 설계가 끝난 상태지만 재원 문제 등으로 아직 착공하지 못하고 있다.
Q : 대성당 옆에 또 채플, 좀 과한 것 아닌가.
A : “춤토르가 2014년 성지를 둘러보고 나서 ‘이미 너무 많은 종교적 그림들이 디자인돼 있어서 더 이상 종교적 건물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며 티 하우스를 제안했다. 티 하우스라는 형태지만 훌륭한 건축물이 만들어내는 특별한 공간 안에서 얼마든지 하느님을 만나 영적 체험을 할 수 있다고 했다.”
Q : 티 채플은 찻집 혹은 카페와 뭐가 다른가.
A : “춤토르가 한국에 왔을 때 나와 함께 진관사에서 템플 스테이를 했다. 인사를 나누고 처음 한 일이 차 마시는 일이었고, 헤어지기 전에도 차를 마시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춤토르는 차를 마시는 것이 단순히 음료를 마시는 것과는 다른, 서로 마음을 열고 소통하는 영적인 여정을 포함하는 것이란 걸 느꼈던 것 같다. 차는 종교를 넘어서서 서로 교감하며 마음을 부드럽게 열어주고 위안을 준다.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위안과 치유의 공간을 열어주겠다는 남양성모성지의 정신과도 일치한다.”
Q : 성당 대신 티 채플을 짓는 계획에 반대 여론은 없나.
A : “교회에서의 고해성사와는 다른 형태의 만남, 얼굴을 맞대고 눈을 마주치고 삶의 슬픔과 고통을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신자들도 있다. 비신자들은 순례를 마치고 특별한 건축물 안에서 차를 마시며 이제껏 느끼지 못한 영적인 것과 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점들을 설득하려고 한다.”
Q : 왜 춤토르인가. 유명 건축가이기 때문인가.
A : “1995년 건축 여행을 하면서 춤토르가 만든 베네딕토 채플과 발스 온천장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건축이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다는 걸 느꼈다. 아파 누웠을 때 발스 목욕탕에 가면 아프지 않고 치유받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성지에 성당을 짓게 되면 이런 건축가와 일하면 좋겠다는 꿈을 그때 꾸게 됐다.”
Q : 대성당 건립은 월 2만원씩 50개월을 기부하는 신자와 후원자 3만명의 힘으로 이뤄졌다. 티 채플 건립 비용도 같은 방식으로 할 것인가.
A : “관심 있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크라우드 펀딩을 생각하고 있다. 이를 위해 춤토르가 실제 크기의 10분의 1 모형으로 제작한 티 채플의 모형과 제작 공정을 보여주는 전시회를 오는 9월쯤 열려고 한다. 실제 설치될 장소에서 모형 전시를 보게 된다면 왜 이곳에 티 채플이 필요한지 모두 이해하게 되리라 믿는다.”
이 신부의 소망대로 춤토르의 티 채플까지 완성되면, 남양성모성지는 특별한 위로와 치유가 필요한 상처받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평화의 공간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할 것이다. 아시아 최초의 춤토르 건축물이라는 상징성과 함께.
이정민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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