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사법 불신이 키운 사이버 레커

한영익 2024. 7. 18.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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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익 사회부 기자

지난 15일 서울중앙지검 청사 앞에선 기괴한 풍경이 연출됐다. 유튜버 쯔양(본명 박정원)을 협박해 5500만원 계약을 맺은 의혹을 받는 유튜버 구제역(본명 이준희)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소환 통보도 하지 않았는데 막무가내로 검찰청사를 찾아온 것이다. 정작 카메라 앞에 선 그는 난데없이 “대한민국 최고 학부 카르텔을 고발하기 위해 왔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후 종합민원실에서 40분간 머무르다 “황금폰 한 대를 제출했다”고 한 뒤 현장을 떠났다. 당연히 검찰 조사는 받지 못했다. 현장기자들 사이에선 “황당하다”는 반응이 나왔다.

유튜버 구제역이 15일 서울중앙지검으로 자진 출석하며 입장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이날 소동은 지난해 5월 ‘셀프출석’ 논란을 일으킨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자진 출두보다 더 맥락이 없는 출석이다. 송 전 대표가 연루된 민주당 돈봉투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는 4월 압수수색 등 수사 초기 단계였다. 대면 조사를 위한 수사가 충분히 진행되지 않았던 만큼, 민주당 내부에서도 자진 출두가 부적절하다는 평가가 잇따랐다. 이에 비해 검찰의 ‘사이버 레커(Cyber wrecker)’ 수사는 착수조차 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실제로 검찰은 구제역이 현장을 떠난 뒤에야 관련 사건 7건을 수원지검 형사2부에 배당했다. 결국 수사를 하지도 않는 검찰청사에 가서 소음만 잔뜩 일으킨 꼴이 됐다. 대한민국의 사법 시스템과 법집행기관을 우습게 알고 벌인 일이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이런 셀프 출석 행태는 예고된 측면도 있다. 사이버 레커들의 비즈니스 모델인 ‘분노 세일즈’가 사법 불신 풍조에 기대어 성장해왔기 때문이다. 피해자 동의도 받지 않고 20년 전 일어난 밀양 성폭행 사건의 가해자를 공개하는 사적 제재 방식이 대표적이다. 명백한 범죄지만, “공적 제재가 못하는 일을 대신한다”고 강변하며 이런 식의 돈벌이에 열중하는 이들이 지금도 적지 않다. 레커들이 쯔양 협박과 관련해 대화를 나누는 통화녹음에선 이런 표현도 등장한다. “고소당해봤자 끽해야 벌금 몇백만 원 나오고 끝나겠지.” 검찰·경찰 등 수사기관이 자신을 겨냥해봤자 두렵지 않다는 태도다.

이원석 검찰총장은 지난 15일 “사이버 레커들의 구속수사를 적극 검토하라”며 엄정수사를 주문했다. 이 총장의 말처럼 이번 기회에 사적 제재 등 사이버 레커들의 범법행위를 뿌리 뽑아야 한다. 하지만 강력한 처벌에서 그칠 일이 아니다. 레커들이 날뛸 수 있는 토양이 된 사법 불신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건지도 제대로 짚어볼 때가 됐다.

한영익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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