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영의 과학 산책] 설강화, 사라토프 노트
프랑스 수학자 장빅토르 퐁슬레(1788~1867)는 어렸을 때부터 줄곧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대학 졸업 후 공병대에 입대해서 2년 뒤 중위 계급을 달고, 1812년 6월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 참전하였다. 그해 11월 19일, 그는 크라스노이 전투 중 심각한 부상을 당한 채 전장에 버려졌다. 천운이었을까. 그는 러시아군 병사에게 발견되어 극적으로 살아남아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거의 5개월 동안 얼어붙은 평야를 가로질러 볼가 강변 사라토프 수용소로 행군해 갔다. 그곳으로 가는 동안 많은 포로가 추위와 배고픔으로 낙오했지만, 그는 끝내 살아남았다.
그 후 퐁슬레는 1813년 3월부터 15개월간 수용소에 갇혀있었다. 극도의 불안과 긴장 속에서 수학만이 그의 삶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책 한 권도 없는 수용소에서 그는 기하학의 원리에 대한 혁신적 이론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사영 (寫影·혹은 투영) 아래서 변하지 않는 기하학적 성질을 연구한 것이었다. 이때 그가 작성한 노트를 ‘사라토프 노트’라 부른다. 1814년 5월 30일 파리 조약이 체결되어 퐁슬레는 석방되었고, 그해 9월 프랑스로 돌아왔다. 1822년 그는 사라토프 노트를 토대로 『도형의 사영적 성질에 관한 논고』를 완성하여 출판했으며, 이 논문은 사영기하학의 역사적 이정표가 되었다.
사영기하학 하면 흔히 미술의 원근법을 떠올리지만, 그 너머엔 신비하고 경이로운 이야기가 넘친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그 주요 내용이 대수기하학을 포함한 수학의 다양한 분야로 스며들어가 발전하였다. 오늘날에는 영화·내비게이션·로봇·의료영상·보안·건축 등 실생활에서도 널리 활용되고 있으니, 이 모든 게 사라토프 노트가 내어준 선물! 극한의 삶 속에서 탄생한 사라토프 노트를 한겨울 눈 속에서 피어난 꽃, ‘설강화(雪降花)’라 부를 만하다. 퐁슬레는 평생 고통스러운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피운 꽃은 하얀 눈처럼 눈부시다.
이우영 고등과학원 HCMC 석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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