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텃밭’ 유럽을 뚫다...‘K배터리’ 다시 희망가 [스페셜리포트]

김경민 매경이코노미 기자(kmkim@mk.co.kr), 배준희 매경이코노미 기자(bjh0413@mk.co.kr) 2024. 7. 17.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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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즘(대중화 직전 일시적 수요 침체)’ 여파로 위기에 내몰린 ‘K배터리’가 다시 부활하는 것일까. 국내 배터리 업체가 ‘중국 텃밭’이었던 유럽 시장 공략에 성공하면서 점차 기대가 커지는 모습이다. 다만 한편에서는 중국 기업이 배터리 가격 주도권을 쥐고 있는 만큼 배터리 패권을 되찾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비관론도 여전하다.

LG엔솔, LFP 배터리 수주 눈길

중국 독무대였지만…“이젠 해볼 만”

LG에너지솔루션은 최근 대규모 수주 소식을 전했다. 전기차용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를 프랑스 완성차 업체 르노에 공급하기로 한 것.

LG에너지솔루션은 프랑스 파리 르노 본사에서 르노 전기차 부문인 암페어와 39GWh 규모의 파우치형 LFP 배터리를 공급하는 계약을 맺었다고 밝혔다. 전기차 59만대를 생산할 수 있는 양으로 공급 기간은 2025년 말부터 2030년까지 5년간이다. 르노는 LG에너지솔루션 배터리를 적용한 준중형 전기차를 2026년쯤 생산할 계획이다.

이번 LFP 배터리 수주는 단순한 수주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당초 CATL, BYD 등 중국 배터리셀 제조사들이 LFP 배터리 등 중저가 배터리 시장을 장악해 삼원계(NCA) 배터리에 주력해온 한국 업체들은 비상이 걸렸다. 뒤늦게 LFP 배터리 개발에 뛰어들기는 했지만 중국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 유럽 업체가 한국산 LFP 배터리를 선택하면서 LFP 시장에서도 중국 업체와 해볼 만한 환경이 조성됐다는 평가다. 향후 르노를 비롯해 유럽연합(EU), 미국 등에 거점을 둔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한국산 LFP 배터리를 대거 채택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도 나온다. 때마침 운도 들어맞았다. 중국 전기차 업체들이 최근 LFP 배터리를 도입해 가격 경쟁력을 높이면서 EU 시장을 점차 장악하는 분위기였다. 이를 지켜본 EU 집행위원회는 중국산 전기차 관세를 10%에서 최대 38.1%로 높이기로 했다. 중국산 전기차에는 대부분 중국산 배터리가 장착되는 만큼 본격적인 중국산 배터리 견제에 나섰다는 의미다. 덕분에 국내 배터리 업체들에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는 분석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자체 셀 제조 기술에 중국 CATL이 개발한 셀투팩(CTP) 공정을 적용해 원가 경쟁력을 높였다. 셀투팩은 모듈이 들어갈 자리에 셀을 더 넣을 수 있도록 설계한 기술로 그만큼 에너지 밀도가 높아진다.

LG에너지솔루션은 폴란드 공장(약 연 90GWh)에서 르노의 유럽 공장에 배터리를 납품할 예정이다. 최근 유럽 전기차 판매가 줄면서 폴란드 공장 가동률이 떨어졌는데 이번 기회로 가동률을 높일 수 있게 됐다.

삼성SDI와 SK온도 2026년 양산을 목표로 LFP 배터리를 한창 개발 중이다. 이석희 SK온 사장은 지난 3월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인터배터리 행사에서 “내부적으로 LFP 배터리 개발이 완료됐고, 고객과 구체적인 협의가 완료되면 2026년쯤 양산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뿐 아니다. 요즘 대세로 떠오른 에너지저장장치(ESS)용 배터리 시장 분위기도 나쁘지 않다. 삼성SDI는 최근 ESS용 배터리 시장에서 대규모 수주 소식을 알렸다. 미국 최대 전력 기업인 넥스트에라에너지에 ESS용 배터리를 납품하기로 했다. 총 용량 6.3GWh로 지난해 북미 전체 ESS 용량(55GWh)의 10%를 훌쩍 넘어서는 규모다. 금액으로 따지면 1조원에 달한다.

20피트 컨테이너로 구성된 삼성SDI의 ‘삼성배터리박스(SBB) 1.5’는 공간 효율성을 높여 기존 제품보다 에너지 밀도를 37% 끌어올린 것이 특징이다. LG에너지솔루션도 ESS용 배터리 시장이 더 커질 것으로 보고 미국 미시간 공장과 중국 난징 공장의 전기차용 배터리 생산라인 일부를 ESS용으로 전환하는 중이다. 이를 두고 배터리업계에서는 중국이 LFP 배터리를 앞세워 장악한 글로벌 ESS용 배터리 시장에서 ‘한국의 반격이 시작됐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때마침 미국이 2026년부터 중국산 ESS용 배터리에 25% 관세를 부과키로 한 것도 삼성SDI를 비롯한 국내 배터리 업체에 호재다.

글로벌 ESS용 배터리 시장도 점차 커지는 모습이다. 세계 각국이 전력난을 이겨내기 위해 태양광 발전 설비를 앞다퉈 설치하는 덕분이다. 시장조사 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글로벌 ESS 시장 규모는 전년 대비 27% 늘어난 400억달러(약 54조7200억원), 2035년에는 800억달러(약 109조4240억원)에 도달할 전망이다.

전기차 수요 정체를 뜻하는 ‘캐즘’으로 국내 2차전지 업계가 실적 부진에 허덕인다. 사진은 지난 3월 ‘2024 인터배터리’ SK온 부스에 모인 K배터리 3사 수장들. (연합뉴스)
위기 요인도 여전

1. 美·유럽서 친환경 동력 약화

국내 배터리 업체 수주가 늘면서 분위기가 살아나지만 아직 샴페인을 터뜨릴 단계는 아니다. 2차전지 산업을 둘러싼 위기 요인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먼저 유럽·미국 등 전기차·2차전지 산업과 밀접한 권역에서의 정치 지형 변화를 눈여겨봐야 한다. 유럽에선 극우 물결이 거센 가운데, 미국에선 TV 토론 이후 ‘트럼프 대세론’이 점차 탄력을 받고 있다. 새 국제 질서 형성과 맞물려 경제가 정치에 휘둘리는 ‘폴리코노미(Politics+Economy)’ 격랑이 2차전지 산업을 휩쓸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하다.

유럽에선 반(反)이민·보호무역주의를 앞세운 극우 정당 약진이 두드러진다. 프랑스 조기 총선 2차(결선) 투표에선 중도·좌파 연합의 막판 후보 단일화로 가까스로 중도·극우 정당 ‘국민연합(RN)’ 돌풍을 막아냈다. RN의 집권은 좌절됐지만 극우 정당이 일약 프랑스 정치권 주요 정당으로 도약했단 평가가 나왔다. 영국 총선에서도 극우 세력 약진이 부각됐다. ‘영국판 트럼프’로 불리는 나이절 패라지가 이끄는 극우 성향 영국개혁당은 4석을 확보해 총선에서 처음 당선인을 내며 선전했다.

오는 11월 5일 치러질 미국 대선은 2차전지 업황을 가를 핵심 변수로 꼽힌다. 최근 첫 대선 후보 토론에서 고령 리스크를 드러낸 바이든 대통령이 대선 레이스 완주 의지를 거듭 피력하지만, 후보 사퇴론이 거세다. 공화당 후보 트럼프 전 대통령은 각종 여론조사에서 바이든과 격차를 벌리며 대세론 굳히기에 사활을 걸었다.

특히, 2차전지 산업 수요는 정책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점에서 세계 정치 지형 변화에 따른 후폭풍이 간단치 않다. 미 대선 결과에 따라 변동성이 크게 확대될 것으로 우려되는 정책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다. 트럼프 경제 정책의 뼈대는 저렴한 화석연료 기반 에너지 산업을 되살리고, 이를 통해 미국 제조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김현수 하나증권 애널리스트는 “2035년 내연기관차 판매 금지 정책에 대한 ‘롤백(roll back)’을 주장한 ‘유럽국민당(EPP)’이 유럽 의회 1당을 차지한 점,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리스크를 고려할 때, 향후 2~3년간 자동차 고객사의 전동화 계획 조정 리스크가 크다”고 우려했다. 이어 “친환경 정책 강화 기조는 고물가-고금리-양극화 심화로 이어지는 협공에 동력이 다소 약화하는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2. 中 기업 가파른 시장 집중화

중국 기업을 중심으로 세계 2차전지 시장점유율이 확대되는 점도 한국 기업에는 부담이다. 점유율 확대로 향후 생산량 조절을 지렛대 삼아 2차전지업계 가격 주도권을 중국 기업이 거머쥘 수 있어서다. 시장조사 업체 SNE리서치가 공개한 연간 누적 글로벌 전기차 배터리 사용량(중국 포함)에 따르면, 중국 CATL은 지난 2023년까지 약 35%의 누적 사용량 점유율로 전체 1위다. 16% 점유율을 보인 BYD가 2위에 올랐다. 반면, LG에너지솔루션(15%), SK온(6%), 삼성SDI(5%) 등은 상대적으로 저조한 점유율로 각각 3위, 5위, 6위에 올랐다. 이들 국내 3개 기업 합산 점유율은 약 26%로, CATL 점유율에 못 미친다.

올 1분기에도 CATL과 BYD 등 중국 기업이 매출·출하량 등에서 약진했다.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 1분기 매출 기준 시장점유율은 LG에너지솔루션이 16%로 2위, 삼성SDI는 9%로 4위, SK온은 5%로 5위를 기록했다. CATL이 약 30%로 선두를 지켰다. 성장세가 가파른 BYD는 11%로 3위다. 출하량 기준으로는 CATL(36%)과 BYD(15%)가 1, 2위를 달렸다. LG에너지솔루션은 14%로 3위, 삼성SDI가 7%로 4위, SK온이 5%로 6위를 차지했다.

최근 유럽연합(EU)이 관세 장벽을 높이자 중국 기업은 이를 우회하는 전략으로 시장 공략의 고삐를 죄고 있다. ‘메이드 인 차이나’ 딱지를 뗀 차를 만들어 유럽 수출 우회로를 뚫겠단 것이다.

지난 7월 8일(현지 시간) BYD는 튀르키예 정부와 2026년 말 가동할 연 15만대 규모 전기차 공장을 짓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BYD 신공장은 2026년 말 가동을 시작한다. 튀르키예는 1996년부터 EU와 관세 동맹을 맺고 있어 유럽에 무관세·저율 관세 수출이 가능하다. BYD는 헝가리에도 전기차 공장을 짓는다.

물론 EU 집행위원회가 별도 단서 조항을 달아 BYD의 우회 전략 무력화를 시도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미 같은 방식으로 일본 토요타, 한국 현대차, 미국 포드 등이 현지 생산을 통한 관세 혜택을 누리고 있어 중국 기업에만 별도 기준을 적용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BYD뿐 아니라 상하이자동차, 창성자동차, 지리자동차 등 다른 중국 기업도 미국·EU의 고율 관세 우회를 위해 태국·튀르키예·멕시코·브라질 등에 현지 공장 설립을 잇따라 추진 중이다. 산업계에서는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3~4년 뒤쯤 고율 관세 장벽도 무력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3. 2025년 ‘데스밸리’ 우려

2차전지업계가 우려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전기차 ‘캐즘’이 내년까지 이어질 경우다. 국내 2차전지 기업의 북미, 유럽 공장 가동 스케줄은 대부분 2025년에 맞춰져 있다. LG에너지솔루션 미국 애리조나 공장은 55억달러 규모 프로젝트로, 2025년 말 양산을 목표로 한다. SK온도 마찬가지다. 포드 합작법인 ‘블루오벌SK(2025년 1분기)’, 조지아 현대차 합작공장(35GWh·2025년 4분기)을 포함한 모든 공장이 완공돼 정상 가동될 경우 2025년 SK온의 글로벌 생산능력은 220GWh에 달한다.

내년에도 가동률 저하가 지속될 경우 이들 기업은 고정비 직격탄을 맞는다. 이미 국내외 공장 가동률은 뚝뚝 떨어지고 있다. 지난 1분기 SK온 중대형 전지 국내외 공장 가동률은 69.5%에 그쳤다. 2022년 86.8%, 2023년 87.7%에서 뚝 떨어졌다. LG에너지솔루션은 50%대까지 낮아졌다.

설비 투자 기반 산업은 대규모 고정비를 깔고 앉지만, 생산량이 일정 수준을 웃돌면 단위 생산비용이 급감하는 ‘이익 레버리지’ 효과를 누린다. 반대로, 지금처럼 공장 가동률 약세로 생산량이 급감하면 단위원가 부담이 급증하는 ‘레버리지의 역습’에 노출된다. 공장 가동률이 줄더라도 고정비는 그대로인 만큼 단위원가 부담이 커진다.

가동률 저하 현상이 지속될 경우 고정비 부담에 달러 부채 급증에 따른 이자 부담까지 떠안아야 한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해 말보다 원·달러 환율이 10% 오르면 법인세차감전순이익이 257억원 줄어든다. SK온은 최근 2년 새 달러 부채가 2.5배(152%) 늘었다. 지난해 말보다 원달러 환율 5% 상승 땐 SK온 법인세차감전순이익이 220억원 감소한다.

리튬·니켈 등 원재료 가격 하락에 따른 ‘역래깅 효과(원재료 투입 시차에 따른 이익 감소)’도 손익 관리를 난제로 만드는 요인이다. 2차전지 산업은 원재료 매입과 투입 간 시차가 손익에 영향을 미치는 ‘래깅 효과’가 크게 작용한다. 가령, 제품 판매 때 원자재 가격이 매입 시점보다 올랐다면 긍정적인 래깅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미리 싸게 사둔 원자재로 양극재 등 제품을 만들어 이를 상대적으로 비싸게 팔 수 있어서다. 반대로, 원자재 가격 하락 국면에서는 비싸게 사둔 원자재로 만든 제품을 상대적으로 싸게 팔 수밖에 없어 부정적 래깅 효과가 빚어진다. 익명을 원한 2차전지 업종 애널리스트는 “재무 상태가 열악한 일부 기업은 현지 생산법인 대여, 현금흐름 적자 등으로 개별 기준 현금은 내년쯤 거의 바닥날 것으로 보고 있다”고 우려했다.

위기 요인이 산적한 가운데 그나마 미국 테슬라 판매 실적이 최근 반등세를 보인 점은 호재다. 테슬라의 올 2분기 차량 인도량은 44만3956대로 전분기(38만6810대) 대비 14.8% 증가했다. 월스트리트 전문가들의 평균 전망치(43만8019대)를 웃돈 성적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올 8월부터 테슬라 전기차에 탑재하는 ‘4680(지름 46㎜, 높이 80㎜) 배터리’ 생산을 시작한다. 이 배터리는 기존 ‘2170(지름 27㎜, 높이 70㎜) 배터리’와 비교해 에너지 밀도는 5배, 출력은 6배 높이고 주행 거리도 16% 늘렸다. ‘꿈의 배터리’로 불리는 전고체 배터리도 2026년 양산한다는 목표지만 곧장 실적에 반영될지는 미지수다. 배터리업계 관계자는 “국내 배터리 업체들이 LFP 시장에서 성과를 내고 차세대 배터리 시장도 공략하지만, CATL·BYD 등 중국 기업 성장세가 워낙 가파르다는 점이 변수다. 당분간 K배터리 업체들이 경영난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고 귀띔했다.

[김경민 기자 kim.kyungmin@mk.co.kr 배준희 기자 bae.junhee@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68호 (2024.07.10~2024.07.2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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