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간첩, 한국 간첩 그리고 일본 [온라인칼럼]
한국계 외교통이 간첩 혐의로 미국에서 체포됐다고 17일 뉴욕타임스가 보도했습니다. 전직 미 중앙정보부(CIA)에 근무했던 한국계 1.5세 수미 테리 미 외교연구원 수석연구원입니다.
미국 안에서 외국 정부를 위해서 일하려면 엄격한 규제를 받습니다. 외국 에이전트 등록법(Foreign Agents Registration Act·FARA법)에 따라 외국 정부의 공식 로비스트로 등록하거나, 외교관 비자를 받은 사람만 가능합니다. 미국 내 연구기관이나 시민단체, 의회 주변의 로비스트들이라도 법무부에 등록하지 않고 외국 정부와 은밀한 논의를 하면 간첩 혐의로 조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미 법무부의 FARA법 안내 브로슈어에는 이런 사례들이 제시돼 있습니다.
“유력한 사업가가 에너지 정책을 논의하기 위해 약속을 잡았다. 미국 정부의 정책이 사업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논의하는 자리로 생각했는데 예상 밖의 주제를 꺼낸다. 미국에서 특정 국가의 이미지가 어떤지 논의하면서 그 나라의 정부 지도자나 대변인들이 했던 말들을 계속 반복하는 듯 보인다.”
“전직 의원이 농산물 관세를 논의하기 위한 미팅을 요청했다. 이 사람은 도시 지역에서 선출됐고 농산물이나 무역 문제에 관련된 적이 없었다. 이 전직 의원은 미팅에서 관세 문제 대신 어느 외국 유력자와 반체제 인사 석방 문제를 주제로 삼는다. 내용은 그 나라 정부 지도자와 대변인의 입장과 유사하다.”
“등록된 로비스트가 통신 인프라를 논의할 미팅을 요청했다. 이 로비스트는 외국 정부나 정당 사람과 함께 나타났다. 이들은 미국의 비즈니스나 회사와는 무관하게 자기네 나라에서 통신 인프라의 중요성만 강조하고, 그 나라와 미국의 관계에 중요한 이슈에 초점을 맞춘다.”
“로비스트로 등록된 사람이라도 미팅에서 등록된 내용과 무관한 외국 단체와 관련된 주제를 논의한다.”
특히 이 과정에서 외국 정부의 직간접 지원을 받은 선물이나 소액의 금품을 받는 경우에는 연방수사국(FBI)에서 심각한 사안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수미 테리의 경우 10년 전인 2014년 11월 FBI의 조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뉴욕주 검찰의 기소장을 보면 그 후로 FBI는 그녀의 뒷조사를 끈질기게 했습니다. 명품 가방을 선물로 받고 고급 식당에서 한국 국가정보원(NIS) 직원들과 식사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기소장에 있는 사진을 보면 명품샵에서 국정원 직원이 대신 결제하고 쇼핑백을 들고 가는 장면까지 있습니다. 국정원 직원도 이름을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1, 2, 3으로 번호를 붙여 특정하고 있습니다.
수미 테리 박사는 대북 전문가로 북한의 인권을 위한 활동을 해왔고, 이를 위해 때로는 한국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며 한국 정부와 접촉 때문에 자신이 메시지를 바꾸거나 한국 정부를 위해 일한 바는 없다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공소장에 따르면 FBI는 2014년 이후에도 여러 번 테리 박사를 조사했습니다. 이제 와서 그녀를 기소한 데에는 다분히 미국 정부의 정치적 판단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FARA법은 미국 외교가에서 늘 의식하는 법입니다. 미국의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쉽게 말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문제로 삼자면 언제든 문제가 될 수 있다”면서 “특히 한국 정부가 공공외교 확대 정책의 일환으로 미국 내 민간인과 접촉을 넓혀온 상황이라 온 상황이라서 미국 정부가 예의주시해 온 듯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테리 박사의 기소장에는 그녀가 재직한 연구단체가 한미동맹을 주제로 한국 연구기관과 함께 행사를 주관하기 위해 공간을 마련한 일이나, 언론 기고를 위해 자료를 요청하고 받은 일까지 문제 삼고 있습니다.
미국 언론들은 테리 박사의 혐의를 한국 정부의 비밀 요원(secret agent)으로 묘사합니다.
비밀 요원이라면 무시무시한 간첩 행위 같지만, 미국 법이 외국 정부의 로비에 의회나 행정부의 정책이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기 때문에 쓰이는 단어입니다. 수미 테리 사건이 공개된 날 뉴욕 맨해튼 연방법원에선 현직 상원의원이 이집트 정부를 위해 간첩행위를 했다는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로버트 메넨데즈 의원은 연방상원 외교위원장까지 지낸 외교계의 거물입니다. 뉴욕타임스도 “미국 행정에 대한 외국의 영향을 막기 위해 법무부가 집중적인 노력을 하면서 최근 몇 년간 수십 건을 기소했다”면서 외국 정부의 선거자금 기부, 은밀한 영향력 행사, 뇌물 등을 사례로 꼽았습니다.
사실 외교가를 취재하다 보면, 정탐(scouting)과 첩보(espionage) 행위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단 생각이 듭니다. 제가 외교통상부를 출입했을 때 가끔 한국에 나와 있는 외국 대사관의 정보관을 만났습니다. 기자들은 이들에게서 외교가의 정보를 들으려고 하지만, 정보관들 역시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 뒤에 있는 흐름과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기자들의 입을 열려고 합니다. 이럴 때면 저 역시 한국 사람으로서 이들에게 어디까지 얘기해야 할지 주춤거리게 됩니다. 물론 한국 외교부와 국가정보원도 기자들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때로는 흘리기도 합니다. 아슬아슬하죠.
문제는 한국의 간첩죄는 미국에 비해 극히 제한적이라는 점입니다. 형법 98조에 규정된 간첩죄는 “적국을 위하여 간첩하거나 적국의 간첩을 방조한 행위, 또는 군사상의 기밀을 적국에 누설한 행위”로 정했습니다. 적국이 아닌 우방국이나 제3국을 위해 정보를 빼돌린 행위는 간첩죄의 대상이 아닙니다. 미국은 한국 정부와 조금이라도 접촉을 갖는 사람이라면 간첩 혐의를 받을 수 있다고 정해놓았는데, 한국은 수수방관하고 있는 겁니다.
중국 경찰이 국내에서 위장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안이 불거졌을 때도, 중국은 적국이 아니라 간첩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점이 논란이 됐습니다. 국민의힘 의원은 물론 더불어민주당 의원들도 이 때문에 간첩죄 조항을 ‘외국을 위하여’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개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워싱턴DC에서 일본은 한국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일본과 미국 사이에 스파이 사건이 있었다는 보도는 최근에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일본과 미국 사이에는 공무원의 교환 근무, 미 의회의 일본 정기 방문 등 수많은 교류가 있지만 문제가 된 적이 없습니다. 워싱턴DC의 한 관계자는 “이런 교류가 미국 법이나 규정으로 제도화돼 있어 미국 정부의 예산으로 이뤄진다”며 “일본 기업이나 정부의 공식적인 로비 활동도 막강하지만, 일본과 미국의 동맹 관계가 그만큼 체계적이란 의미”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미국 정가에 진출한 한국계 인물들도 늘어나고 있는데, 이런 사건이 벌어지면 위축될 수밖에 없다”면서 “로버트 김 사건이 벌어진 게 28년 전인 1996년인데, 한국 정부의 대미 접근 방식은 변한 게 없고 여전히 아슬아슬해 보인다”고 꼬집었습니다.
김지방 디지털뉴스센터장 fatty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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