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여름이었다
유행어… 굳이 설명할 필요
없는 직관에 공감할 수밖에
몇 해 전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문장이 있다. 아무 글이나 써놓은 다음, 한 문장만 덧붙이면 아련하고 문학적으로 변한다는 것이었다. 그 마법의 문장은 “여름이었다”였다. 예컨대 이런 식. “학기 내내 말을 걸지 않았던 연서가 문득 다가와 물었다. 네 노트 좀 빌릴 수 있어? 여름이었다.”
여기에는 논리가 없다. 그러니 ‘사실 필자가 전교에 소문난 필기 왕이었다’ 혹은 ‘수업 내내 졸아서 필기를 못한 연서가 때마침 깨어나 필자와 눈이 마주쳤다’와 같은 맥락을 따져선 안 된다. 그저 ‘여름이었다’만 덧붙이면 글의 뉘앙스가 문학적으로 둔갑한다는 게 핵심이다. “아버지, 언제 이렇게 주름이 늘었어요? 여름이었다”처럼.
한데 대체 왜 여름인가. 동지섣달이었다. 정월 초하루였다. 입춘이었다. 단오였다. 어버이날이었다. 개천절이었다. 연체료 납부 마지막 날이었다.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월요일이었다. 부장과 단둘이 가는 출장 날이었다. 시어머니를 찾아뵙는 날이었다. 개강 날이었다. 인사고과 날이었다. 오랫동안 따져온 월드컵 16강 진출 경우의 수를 확인하는 날이었다. 동원 예비군 소집일이었다. 고소장을 받은 날이었다… 등등.
우리 삶에는 희로애락을 함축하는 무수한 날들이 있건만 유독 왜 ‘여름이었다’가 마법의 문장이 됐단 말인가. 심지어 같은 시기인데 초복, 중복, 말복은 안 된다. 양계업자로서는 심히 억울할 만하다. 나아가 여름의 최정점에 해당하는 8월하고도 그 한가운데인 날, 즉 ‘광복절이었다’도 안 된다. 참으로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에게 미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소설가로서 따져봤다. 왜 여름인지. 인간의 삶은 태양에 절대적 영향을 받는다. 이는 페루가 잉카제국 시절에는 태양신을 섬겼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태양과의 원근에 따라 자연은 소생하고 소멸하고, 동물은 활동하고 휴식한다.
이런 태양열을 가장 많이 받는 때가 여름이니, 인간은 체면과 사회적 자아를 지켜줬던 옷을 덜 걸친다. 동물처럼 해에 따라 활동량을 조절한다. 게다가 ‘이방인’의 뫼르소가 “뜨거운 태양 때문에 살인했다”고 말했듯, 이성적 판단과 행동은 어려워진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원시적 본성이 더 발현되는 시기다. 팽팽하게 유지했던 이성의 끈이 태양열에 느슨해진다.
그리하여 사회적 협동은 좌절되고 개인의 욕망은 팽창해 실패하기 쉬운 시기다. 한데 순수문학은 ‘인간의 실패’를 다루지 않는가. 아울러 인간은 늘 삶을 회고하는 존재가 아닌가. 그러니 실수하고 어긋났던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는 행동이 함축된 문장이 바로 ‘여름이었다’인 셈이었다.
내가 머리를 꽁꽁 싸매며 고민하자 이 문제에 지인이 동참해 줬다. 그에 따르면 여름에는 특유의 낭만이 있다고 했다. 이에 내가 낭만이라면 눈 내리는 겨울, 낙엽 쌓이는 가을, 벚꽃 피는 봄에도 있지 않냐 하니, 지인은 제일 중요한 게 빠졌다고 했다. 바로 소리였다.
그렇다. 여름은 소리의 계절이었다. 매미 소리, 파도 소리, 장마철에 창과 양철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 게다가 문학 시장의 주 소비자는 여성인데, 여성은 청각에 예민하지 않은가. 그리하여 나는 ‘여름이었다’가 마법의 문장이라는 주장에 그만 수긍하고 말았다. 여전히 독립운동가 후손과 양계업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렇듯 비웃어 넘긴 유행어에도 실은 타당한 근거가 있다. 따져보면 인간의 직관만큼 논리적인 게 없다. 그건 우리가 살면서 깨달은 논리들이 몸에 체화돼 굳이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이 곧장 공감했다는 것을 뜻하니까.
따라서 일견 수긍하기 어렵고 이해 안 되는 주장도 일단은 존중하며 차차 들여다보기로 했다. 얼핏 유행이 이해되지 않았던 ‘여름이었다’처럼. 여하튼 인간의 삶에 대해 고찰하며 쓰다 보니…. 그렇다, 여름이었다.
최민석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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