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애의 시시각각] V2, V0 그리고 한남동
대통령제에서 ‘퍼스트레이디’는 현실과 이상이 다른 제도다. 이상적으론 선출된 이의 배우자일 뿐이니 권력과 무관해야 했다. 현실에선 유관했다. 부부의 역학 관계에 따라 권력이 늘어나기도, 줄어들기도 했다.
미국은 판례까지 나왔다. 1990년대 초반 빌 클린턴 대통령이 부인 힐러리에게 의료개혁 태스크포스(TF)를 맡긴 걸 계기로다. 공보 참모인 조지 스테파노풀러스는 “클린턴은 아내를 장(長)으로 선택함으로써 얼마나 의료보장 개혁안을 중요시하는가 잘 보여주리라고 믿었으며 힐러리가 이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고 믿었다”(『너무나 인간적인』)고 했다. 힐러리 자신이 강력한 정치 전술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호된 비판을 받았다.
의사들이 법정으로 가져갔다. 1심과 달리 2심은 힐러리를 ‘사실상(de facto) 연방 관료’로 판단했다. “연방의회 스스로도 대통령의 배우자가 대통령의 보좌관과 기능적으로 동등한 역할을 한다고 인정했다”고 봤다. 상처뿐인 승리였다. TF는 논란 끝에 이미 해산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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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스트레이디, 실권자나 은밀해야
김 여사는 별칭 나올 정도로 활동
"통제 안 되는 사업가 마인드 위험"
」
이는 퍼스트레이디들에겐 오랜 반면교사가 됐다. 실로 퍼스트레이디 권력의 성공 요체는 은밀함에 있다. 권력을 공유하고 때론 막강하지만 막강해 보이는 건 피해야 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는 그러나 막강할 뿐만 아니라 막강해 보이는 데 주저함이 없다. 국민의힘 전당대회를 진흙탕으로 몰아넣은 ‘사과 문자’에서도 드러나듯 말이다.
역대 퍼스트레이디와 달리 사업가 출신이라 그럴 수 있다. 학연이 크게 작용하는 분야에서 자수성가했다. ‘사과 문자’ 중 “(대선 전) 사과 기자회견을 했을 때 오히려 지지율이 10% 빠졌다”에 주목하던데, 개인적으로 다음 말이 더 인상적이었다. “지금껏 제가 서울대 석사가 아닌 단순 최고위 과정을 나온 거로 많은 사람이 인식하고 있다.” 강한 자의식이다.
인적 네트워크도 김 여사 쪽이 방대할 것이다. 국정농단을 수사할 때 좋게 봤다며 정호성을 다른 데도 아닌 대통령실로 부른 걸 보면 윤 대통령의 인재 풀엔 한계가 있다. 김 여사는 대통령 부인으로 초고속 상승하는 동안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연을 맺었다. ‘여사’ 꼬리표 붙은 사람 중 유독 자질론이 제기되는 걸 보면 괜찮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윤 대통령과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의 회동을 위해 ‘밀사’로 뛴 함성득 교수도 학계에선 논란이 있다.
김 여사는 자신의 방식대로 퍼스트레이디로서도 성공 가능하다고 봤을 것이다. 대선 전 이런저런 의혹도 털어버리고 싶었을 테고 말이다. 그렇더라도 대통령 취임 한 달 만에 김 여사가 언론과 단독 인터뷰한 걸 보곤 놀랐다. 더 공적이고 더 전략적이며 더 은밀해야 했다. 지금까지 전개된 걸 보면 김 여사는 그러지 않았다. 공개 행보를 하지 않을 때도, 만나지 않아야 할 사람을 만났고 보내지 말아야 할 문자를 보냈으며 하지 않아도 될 통화를 했다. 공식 라인과 별개로 움직였다. 이 과정에서 V2라거나 V0(제로), VIP 더 나아가 ‘한남동’(관저)이란 별칭까지 얻었다. 윤 대통령은 눈 감은 듯했다.
정치컨설턴트 박동원이 “나는 김 여사가 역대 영부인 중 가장 통 크고 수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서도 “사적인 정무는 아주 위험하다. 통제되지 않는 사업가의 사적 열린 마인드가 공적인 국정과 만나면 큰 사고를 칠 수 있다”고 했는데 동의한다. 김 여사 논란이 제기될 때마다 공식 라인에선 모르니 제때 대응도 안 됐다. 스테파노풀러스가 “백악관 내부에서도 힐러리의 위치(배우자) 때문에 전략적으로 의문을 가지고 대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힐러리는 암암리에 원망의 대상이 됐다”고 했는데, 지금 용산 참모들이 그런 기분 아닐까.
이번 전대 과정에서 윤 대통령과 김 여사는 당원들의 마음도 떠나고 있다는 걸 느낄 것이다. 지금대로 3년을 갈 순 없다. 민심은 한번 돌아서면 진심으로 매섭다.
고정애 중앙SUNDAY 편집국장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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