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영 스님의 마음 읽기] 등 뒤를 지켜주는 이가 있다

2024. 7. 17.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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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영 스님 청룡암 주지

“형님. 저 곧 군대 가요.” 오전 불공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에 휴대전화로 날아든 막내 사제 스님이 전하는 안부에 뇌는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하얗게 멈춰버렸다. 그의 심경에 큰 변화라도 생긴 것일까. 아니면 출가 생활에 위기가 닥친 것일까. 머리는 이미 삭발한 상태이니 옷만 승복에서 군복으로 환복하면 되는 걸까.

찰나의 시간이 길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의외의 통보는 3초도 채 안 되는 공백이 흐르는 시간에 온갖 망상을 불러오게 했다. 그가 타고 갈 입영열차가 은하철도999로 바뀌기 일보 직전, 이어지는 그의 뒷말에 나의 망상은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군 포교를 위해 군종장교가 되는 것이라는 차분하고 당당한 부연 설명이었다. 지난밤 반야심경을 사경하는데 ‘장애 애(礙)’자가 좀처럼 잘 써지지 않더니, 오늘 이런 상황에 맞닥뜨리려고 그랬던 것일까 하는 시답잖은 억측도 함께 추가되었다.

「 군종장교로 입영하게 된 사제
지친 병사의 뒤 지켜주는 임무
모두가 서로 보살피는 존재들

일러스트=김회룡

행자를 거쳐 사미니계를 시작으로 비구니계를 받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녹록지가 않다. 굳은 결심으로 열악한 환경과 수많은 제약을 하나씩 헤쳐 나가야 한다. 인고의 시간을 통해 세속의 일상을 버리고 출가생활을 몸에서부터 마음으로까지 체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정식 출가자의 삶이 시작되었어도, 출가 전 평온할 것이라 상상했던 승가의 일상은 고단하고 치열하기만 하다. 경전 공부는 두말할 나위 없고, 기도 및 기본 수행도 해야 한다. 또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전해야 하는 소임을 행하기 위해서는 큰 범위의 인문학은 물론, 종교 철학 역사 등 여타의 지식과 수양 쌓기도 게을리해선 안 된다. 결국 자신과의 긴 싸움이 출가생활이다.

아무튼 군에서의 전법 수행을 소임으로 택한 그가 걱정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대견스러웠다. 하지만 겉으로는 담담한 어투로 “잘 다녀와”라며 짤막한 인사로만 화답했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가 가는 군대인데, 호들갑 떨 것까진 없으니까.

불교는 ‘불교’ 자체를 지키기 위해 종교전쟁을 치른 바는 미미하나, 그렇다고 전쟁과 인연이 없지도 않다. 인도 최초의 통일 왕국을 이룩한 아소카왕의 경우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주도한 전쟁의 처참함을 통해 이를 참회, 반성하고 불법에 귀의하여 전란 후 도탄에 빠진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며 나라를 바로잡았다. 그리하여 태평성대를 이룬 뒤 이웃 나라까지 불교를 널리 전파하는 데 힘썼다. 비록 우리나라는 중국을 통해 전파된 영향이 크지만, 불교의 세계화에 기틀을 마련했던 아소카왕의 역할이 지대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서쪽 하늘에 걸린 저녁달이 초승과 만월의 몸으로 세 번 바뀔 무렵 반가운 소식이 왔다. 13주간의 군사교육과 기본 소양 교육을 무사히 마치고 임관한다는 것이다. 은사 스님과 함께 행사장에 참석하여 설레는 마음으로 임관식을 지켜보았다. 엄청 근사한 퍼포먼스가 이어지고, 멀리서 우리를 향해 씩씩하게 걸어오는 멋진 해군장교의 모습이 보였다. ‘철없던 절집 아이가 언제 저리 컸을꼬….’ 나도 모르게 심장에서 은근히 달궈진 희열 덩어리가 액화되어 두 눈물샘으로 넘치는 것을 심호흡으로 간신히 막아내고 있었다. 은사 스님은 실패하였는지, 눈가에 번진 홍엽이 안경으로도 가릴 수 없을 만큼 흘러내렸다. 임관식의 대미라 할 수 있는 견장을 좌측 어깨에 은사 스님 손으로 직접 달아줄 때 비로소 사제도 은사 스님도 나도 환하게 웃음을 터트릴 수 있었다.

고된 훈련과 엄격한 규율, 그리고 매 순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군대의 특수성 때문에 한시적이지만 병영생활도 어쩌면 출가생활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목사, 신부, 스님 등 종교의 원리를 떠나 모든 군종장교의 역할이 막중하리라. 임관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마침 지인으로부터 공군사관학교 군종장교를 지낸 이건승 신부 이야기를 들었다. 훈련 강도가 높고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감행한다는 공수 낙하를 스무 살가량 적은 나이의 훈련생들과 똑같은 훈련을 받으며 정규 4회 강하를 해낸 우리나라 최초의 군종신부란다. 하지 않아도 될 공수 낙하를 왜 했느냐는 물음에 그는 “군종신부로서 생도들의 안전한 훈련을 위해 기도하며 훈련에 임했습니다”라며 간결하고 명쾌하게 답했다.

우리는 모두가 서로의 등 뒤를 봐주며 삶을 지탱해 간다. 가족의 뒤를 보살피고, 벗과 사랑하는 이의 뒤를 밀어주고 끌어주며 의지한다. 강력한 힘을 가진 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내 뒤를 봐준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든든한가. 더구나 그 상대가 성직자나 수행자라면 더욱 믿음직스러울 것이다.

뒤를 지켜주는 이들에게 장소의 구분이 있을 리 없다. 지친 병사에게 위안과 평온을 줄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연꽃이 피어나는 곳 아니겠는가.

원영 스님·청룡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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