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에서 눈 맞아 하룻밤... 스마트폰 없던 시절의 사랑
[김상목 기자]
▲ 영화 스틸 이미지 |
ⓒ 에무필름즈 |
관객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다. 여러 2차 매체로 좋아하는 영화를 재관람할 수 있지만, 극장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다. 기술 발전으로 화질과 탁한 음질을 깔끔하게 '리마스터링'한 버전의 경우 환골탈태인 경우도 적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극장과 관객 모두 만족스러운지라 재개봉 붐은 한동안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리차드 링클레이터 감독,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주연한 영화 <비포 선라이즈>는 2번째 재개봉하는 영화다. 1996년 국내에서 처음 개봉했고, 2016년에 1차 재개봉했다. 대개 이런 경우는 시대를 초월한 명작이거나 아니면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 '블록버스터' 영화가 대부분이지만, 이 영화는 큰 흥행 대박이라거나 '고전'의 범주에 들기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경쟁력은 다른 데 있다. 팬층이 넓고 깊게 퍼져 있다. 어떤 이에게는 할리우드 상업영화와는 차별화된 미국 독립영화의 잔향을, 어떤 이에게는 영원한 청춘 로맨스의 표상으로, 또 다른 이에게는 감독과 배우의 조합으로 각인돼 있다.
미국 청년, 프랑스 여인과 열차 안에서 만나다
유럽 대륙을 동에서 서로 횡단하는 열차 안,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프랑스 여인은 객실에서 독서에 열중하려 하지만 쉽지 않다. 옆자리 독일인 커플은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언성을 높이며 말다툼을 멈추지 않는다. 짜증이 나긴 하지만 맞붙어 싸울 수도 없는 노릇, 여인은 자리를 옮기기로 한다. 이동한 자리 옆에는 한 또래 청년이 책을 읽고 있다. 독일인 커플의 언쟁을 보며 피식거리던 두 또래 남녀는 자연스럽게 말을 붙이고, 대화를 이어간다.
청년의 이름은 '제시', 미국에서 왔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볼일을 본 뒤 2주간 유럽을 여행하다 다음 날 오스트리아 빈에서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귀국할 예정이다. 여인의 이름은 '셀린',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있는 할머니에게 들렀다 프랑스 파리로 돌아가는 중이다. 둘은 서로 다른 성향이지만 은근히 죽이 잘 맞는 것도 같다.
빈이 다가오자 제시는 조심스럽게 셀린에게 제안한다. 자신이 유럽에서 보낼 마지막 하루를 함께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아침에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따로 호텔을 잡을 여유는 없으니 그냥 밤을 새우자는 터무니없는 요청이다. 그런데 생전 처음 만난 제시의 말을 들은 셀린은 결국 이를 수락한다. 둘은 함께 빈 정거장에 내린다.
사전에 세워둔 계획 같은 건 없다. 둘은 무작정 여기저기 쏘다니기 시작한다. 중고 레코드 가게의 감상실에 들어가 눈빛을 교환하며 음악을 듣고, 거리의 카페에서 차를 마신다. 시간이 애매해 빈의 명소인 박물관은 들르지 못했지만, 셀린은 자신이 어릴 적 방문한 적 있는 무연고자 묘지로 제시를 안내한다. 대관람차도 탄다. 선상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하며 다뉴브강의 경치를 만끽한다. 클럽에서 맥주를 마시고 거리 곳곳에서 흥미로운 공연도 구경한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간다.
둘은 진실게임으로 서로에게 궁금한 걸 질문하며, 20대 초반의 청춘이면 품을 법한 인생에 대한 고민과 부모 세대와의 관계,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을 공유한다. 제시는 염세적이지만 철학적인 고뇌를, 셀린은 현실의 모순을 바꿔내려는 행동주의 소신을 말한다. 둘의 가치관은 종종 충돌하지만, 이미 호감이 있는 둘은 완급을 조절하며 하루를 즐겁게 보내기로 한다.
작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서로에게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을 확인한 둘은 이제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하룻밤의 추억으로 간직할지, 재회를 기약할지 둘은 눈빛을 교환하며 입을 뗄까 말까 망설이는 가운데 해가 밝아온다.
탈 일상 체험의 모든 것
영화가 제작된 1990년대는 세계사적으로나, 한국 현대사로 보나 중요한 전환기였다. 우선 동서 냉전이 종식되고 유럽은 물론 세계 곳곳에 쳐 있던 철의 장막이 무너진 직후였다. 불안과 혼란이 팽배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과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교류가 전면적으로 펼쳐지던 시절이기도 하다.
부유하고 자유로운 서방세계는 오랫동안 사회주의 블록 내에 갇혀 있던 동유럽 사람들에겐 약속의 땅처럼 빛났고, 수많은 이들이 열차표를 위조하거나 동구 구닥다리 자동차로 서쪽으로 향했다. 그야말로 'Go West' 시절이다. 물론 바람처럼 모든 게 보장될 리 없다. 과거 사회주의권 동유럽은 부강한 서유럽의 노동력 공급처 및 2등 유럽 시민의 처지를 깨닫는다.
셀린이 우리가 이렇게 여행을 태평하게 즐겨도 되는지 제시에게 토로하자 상대방은 선뜻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짓는다. 셀린은 말한다. 불과 300km 거리에서 전쟁이 벌어져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우리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태평스럽게 살아간다고. 유고슬라비아 내전 이야기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유럽대륙 한복판에서의 인종 청소와 대량학살이 공공연히 벌어지던 시기라는 점을 새삼 환기하며, 당대 유럽 사회에 닥친 곤혹스러움을 일깨우는 대목이다. 겉보기엔 평화롭고 살만해 보이는 영화 속 유럽의 풍경 이면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영화는 빼먹거나 놓치지 않는다.
물론 <비포 선라이즈>는 사회문제를 고발하는 데 중심을 두진 않는다. 영화는 동시대의 중요한 쟁점을 살짝 환기하지만, 기본적으로 청춘 로맨스이자 여행 로드무비의 본령을 고수한다. 여행을 떠나야만 경험할 수 있는 소소한 발견과 우리가 일상에 머물 때 깨닫지 못하는 문화와 풍습의 차이를 발견하는 작은 재미가 영화 곳곳에 숨어 있다.
제시가 원래의 여행목표가 어그러져 충동적으로 구매한 유레일패스로 몇 주째 방랑 중인 비좁은 열차 안은 그 자체로 곧 작은 세계다. 영어와 프랑스어, 독일어 등 다양한 언어가 객실 칸 안에서 다중채널로 실시간 라이브 스트리밍되듯 동시에 들려온다. 제시는 이런 각양각색의, 하지만 다들 별반 본질로는 다르지 않을 평범한 세계 각국 사람들의 일상을 1년 365일 내내 하루씩 보여주면 어떨까 하며 프로그램 기획을 구상하고 셀린은 똑같은 일상 반복을 누가 보겠냐며 품평한다.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같은 서방세계라는 공유점에도 불구하고 미국인 제시와 프랑스(유럽)인 셀린이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려 하는 문명인의 자존심 싸움은 영화 내내 약방의 감초처럼 작용한다. 언어라고는 영어밖에 모르는 무식한 미국인과 서비스 정신 제로인 불친절한 유럽인의 일진일퇴는 우리 눈에는 똑같아 보인다. 그런데 사실 서구 백인들 사이에도 언어와 기질을 비롯한 문화 전반에서 하나로 뭉뚱그릴 수 없는 차이를 확연히 일깨운다. 여행을 떠나야만 목격할 수 있는 각성의 순간이다.
하지만 20대 청춘들이 여행 중 우연히 갖게 된 탈 일상의 체험은 모든 차이를 무력화시키고, 평소라면 감히 감행하지 못할 도전을 자연스럽게 만든다. 감정을 좇아 순간의 쾌락을 탐닉하는 게 아니라 그 나이에만 가능한 모험에 뛰어드는 것이다. 특정한 시기에만, 그리고 조금 더 순수할 때만 가능했던 것들이다. 휴대전화나 아이패드가 보이지 않는 것 말고는 지금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뵈는 1990년대 중반이지만,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어떤 풍경은 그야말로 '순수의 시대' 그 자체다.
요즘이라면 옆자리 사람이 말을 걸려 눈빛을 보내도 에어팟과 스마트폰에 눈과 귀를 빼앗긴 터라 제시와 셀린 같은 만남의 확률은 1/10 이하도 안 되지 않을까. 물론 무작정 시를 써주거나 손금을 봐준다며 다가오는 낯선 이들도 경계 대상이다. 청춘남녀가 마지막 밤을 보내려 하니 포도주 1병 적선하라는 천연덕스러운 제안에 기꺼이 찬조하는 술집 주인도 찾기 힘들어진 건 물론이다. 세상은 그 시절보다 훨씬 각박해지고 타인을 불신하는 게 당연시됐다.
아름다운 청춘 압축한 특별한 여행의 추억
영화는 그저 제시와 셀린, 두 청춘남녀의 하루 동안의 빈 체류를 그려낼 뿐이다. 둘은 쉴 새 없이 대화를 나누며 곧잘 인생과 철학에 관한 토론으로 이어진다. 제시는 13살 악동의 짓궂은 시선으로, 셀린은 임종을 앞둔 노파의 몽상처럼 세상을 바라보지만, 여행이라는 비일상적인 시공간이 그렇게 차이 나는 둘의 교감을 자연스럽게 끌어낸다.
딜런 토머스의 생과 사에 관한 성찰적 시를 암송하는 제시와 1968년 문화혁명 참여세대의 자녀로서 주체적인 여성으로 행동하려는 셀린의 관점은 서로 묘하게 엇갈리지만, 충돌보다는 소통과 호기심으로 작용하며 보기 드문 대화의 재미를 선보인다. 아마 요즘 같으면 서로 관점이 다르다며 아예 대화를 포기했을지 모른다.
둘의 여정은 그저 여행길에서 이성에 대한 끌림이나 성적 일탈에 그치지 않고, 인간 대 인간이자 동 세대로서의 고민을 공유하려는 토론 과정에서 더욱 교감을 깊게 다져간다. 그런 영화 속 둘의 상호공감 과정은 단지 청춘 로맨스의 단계를 아득히 뛰어넘는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으로서 둘은 적지 않은 시각 차이가 존재함에도 대화를 통해 각자에게 빈 공백을 채우고 다른 관점을 접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를 통해 단지 같은 또래 남녀의 소통을 넘어 미국과 프랑스(유럽)의 대서양을 뛰어넘는 문화적 교류가 구현되는 셈이다. 시대를 초월해 청년세대가 부모세대의 보호막을 벗어나 자립할 것을 고민할 때 일어나는 창조적 혼란에 대한 공감대는 덤이다.
이 영화가 국내에 선보였을 때, 적지 않은 이들이 작품 속 주인공들처럼 해외 배낭여행에 도전했다. 그런 경험이 <비포 선라이즈>를 흥행 대박과는 별개로 한 시대의 '송가'이자 '상징'이 되는 문화적 기억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셈이기도 하다.
한국 역시 경제성장의 과실이 열매를 맺으면서 조금 허리띠를 졸라매고 일정 기간 준비하면 마침내 절약해 가며 사실상 섬나라의 한계를 뛰어넘는 경험에 도전할 수 있게 된 첫 시기였다. 아마 개봉 당시 영화를 보며 부푼 꿈을 안고 주인공들과 같은 신기한 인연이 혹 생기지 않을까 두근거렸던 이들이라면, 화면 가득 펼쳐지는 빈의 근사한 그림 같은 풍경과 함께 제시와 셀린의 청춘 그 자체를 압축한 것만 같은 빛나는 눈빛과 젊음의 기운에서 자신들의 과거를 회상하며 미소와 회한을 동시에 겪게 될 테다. 그렇게 영화를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주인공들을 따라 체험할 수 있었던 점 역시 이 작품이 갖게 된 초월적 개성을 돋보이게 하는 영화 외적 요소일 테다.
이 시리즈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라면 <비포> 시리즈가 3부작으로 완성됐음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이미 2016년에 재개봉했던 시리즈는 1달 간격으로 후속편들이 차례로 2차 재개봉을 준비하고 있다.
아마 이번에 처음으로 해당 시리즈를 접하는 이들보다 추억을 다시 목격하려는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을 테다. 즉, 제시와 셀린이 다시 만나게 될지,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가물가물해도 기억 속에 이미 들어차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굳이 1달씩 순차적으로 재개봉을 결정한 것은 그 나름대로 감상법을 제시하는 태도가 아닐까 상상해본다. 거의 30년 전에 출발해 영화 속 주인공들과 함께 나이를 먹어온 이 기념비적 시리즈의 연대기를 실제 영화와 속편들의 간격만큼은 아니라도 새로 복습하며 음미해보라는 제안일 테다.
<비포 선라이즈>를 보고 난 뒤 굳이 그들의 후일담을 억지로 떠올리거나 찾을 필요 없이, 1달 뒤에 <비포 선셋>, 그리고 또 1달 뒤 <비포 미드나잇>으로 차례대로 확인하며 재발견하는 게 이번 재개봉의 올바른 관람법이다. 그저 추억보정으로 그칠 게 아니라, 동시대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영화 속 행간의 보물찾기와 함께, 같은 영화의 재탕이라도 관객의 인생체험이 달라졌을 때 전혀 다른 형상으로 다가오는 영화의 마법을 확인할 기회다.
<작품정보>
비포 선라이즈 Before Sunrise
1995 | 미국 | 드라마, 로맨스
2024.07.17. (재)개봉 | 100분 | 15세 관람가
감독 리차드 링클레이터
출연 에단 호크(제시 역), 줄리 델피(셀린 역)
수입/배급 에무필름즈
1995 45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감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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