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 위해 '원수의 고향' 찾아 온 건달이 만난 사람이 하필...
[양형석 기자]
배우들도 마찬가지지만 상대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연출할 수 있는 기회가 더 적은 감독들은 자신의 커리어에 '대표작'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영광이다. 물론 관객과 평단의 극찬을 받은 대표작을 만든 후 차기작의 완성도가 전작에 미치지 못해 비판을 받는 감독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을 가지면서 자신의 영화인생을 대표할 만한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아무에게나 찾아오지 않는 '특권'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의 조교수로 재직 중인 이정범 감독은 성공한 영화인이라고 할 수 있다. 2010년 연출과 각본을 담당한 영화 <아저씨>가 화려한 액션과 스타일리시한 영상미로 극찬받으면서 그 해 한국영화 최다관객(628만)을 동원했기 때문이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실제로 이정범 감독을 아는 관객은 많지 않아도 <아저씨>를 만든 감독'이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일 관객들이 적지 않다.
사실 이정범 감독은 <아저씨> 이후 2014년 <우는 남자>와 2019년 <악질경찰>이 차례로 좋지 않은 평가 속 흥행에 실패하면서 관객들을 실망시켰다. 하지만 이정범 감독이 <아저씨>라는 '인생작'을 만들기까지의 과정은 나쁘지 않았다. 특히 높지 않은 흥행성적에도 진중한 이야기와 가볍지 않은 연출로 관객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던 설경구, 나문희 배우, 조한선 주연의 <열혈남아>는 이정범 감독의 숨은 명작으로 꼽힌다.
▲ 재문(왼쪽)은 자신이 죽여야 할 원수의 어머니인 점심과 묘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며 가까워진다. |
ⓒ CJ ENM |
영화를 좋아하는 중·장년층 관객들에게 <열혈남아>는 유덕화와 장만옥이 출연했던 왕가위 감독의 데뷔작으로 알려져 있다. K팝 팬들에게는 2AM과 2PM을 탄생시켰던 2008년 Mnet에서 방송됐던 오디션 프로그램이 떠오를 수도 있다. 물론 2017년부터 2020년까지 활동했던 '열혈남아'라는 아이돌 그룹도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은 설경구와 나문희 배우, 조한선이 출연했던 범죄 누아르 장르의 한국영화도 생각날 것이다.
2002년 신인 시절의 고 이선균이 출연한 단편영화 <굿바이 데이>를 연출한 이정범 감독은 2006년 각본과 연출을 모두 맡은 <열혈남아>를 통해 장편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 <열혈남아>는 조직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가장 의지하던 동료이자 친구를 눈앞에서 잃게 된 재문(설경구 분)이 복수를 꿈꾸며 조직에 갓 들어온 치국(조한선 분)과 함께 원수인 대식(윤제문 분)의 고향에 내려가 그의 어머니를 만난다는 내용의 영화다.
사실 조직폭력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범죄 누아르 영화는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기보다는 관객들이 이해하기 편하도록 '피아구분'을 확실히 해두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열혈남아>는 친구의 복수를 꿈꾸는 재문과 또 다른 조직의 보스로부터 재문을 처리하라는 지시를 받는 치국,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고 재문과 인간적인교감을 나누는 점심(나문희 분)의 이야기가 어우러지면서 관객들이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겨뒀다.
읍내 체육대회에 참가한 재문은 달리기 경기가 끝나고 대식을 따라 학교건물로 들어가 교실에서 격투 끝에 대식을 죽이고 친구의 복수에 성공한다. 하지만 복수를 끝내고 나온 재문은 원기(김준배 분)의 오더를 받은 치국의 칼에 찔려 치명상을 입는다. 치국은 "건달은 시키면 하는 거니께 내는 하나도 안 미안하오"라며 현장을 빠져나가지만 함께 지낸 재문을 죽인 죄책감에 차를 세우고 논두렁에 뛰어들어 오열한다.
2000년부터 2003년까지 <박하사탕>과 <공공의 적>,<오아시스>를 통해 무려 국내외 17개 영화제의 연기상을 휩쓸었던 '괴물배우' 설경구에게 2000년대 중반은 잠시 숨을 고르던 시기였다. 그렇다고 그 시절 설경구의 연기가 서툴렀다거나 성의가 부족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설경구는 <열혈남아>에서 친구의 원수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면서도 원수의 어머니와 인간적인 정을 나누며 가까워지는 재문의 복잡한 감정을 잘 표현했다.
▲ 나문희 배우는 <열혈남아>에서 노련한 연기로 관객들을 사로 잡았다. |
ⓒ CJ ENM |
나문희 배우는 1995년 KBS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이미 연기에 대해서는 '만랩'을 찍은 배우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 영화 활동은 거의 없었다. 그러던 1998년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영화활동을 시작한 나문희 배우는 2006년 <열혈남아>에서 벌교에서 국박집을 운영하는 조폭두목 대식의 어머니 김점심 역을 맡아 명불허전의 연기를 선보였다.
점심은 남극 탐사를 떠났다가 선박이 침몰돼 실종된 둘째 아들이 살아 있다고 굳게 믿으며 정기적으로 차남에게 보낼 물건들을 구입해 남극으로 보낸다. 그리고 물건을 구입하고 옮기는 과정을 재문이 도우면서 두 사람 사이에 정이 쌓인다. 재문은 치국의 칼에 찔려 치명상을 입은 후에도 점심의 국밥집에 찾아가는데 이때 테이블에 엎드려 숨을 거둔 재문을 보며 원망하고 타박하는 나문희 배우의 연기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여러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주로 건달이나 조직폭력배 두목을 많이 연기하는 김준배는 <열혈남아>에서도 중년의 건달두목 원기 역을 맡았다. 김준배는 <열혈남아> 출연 당시 매체 및 영화 활동을 많이 하던 시절이 아니라 <범죄와의 전쟁:나쁜 놈들 전성시대>의 김성균이나 <범죄도시>의 진선규처럼 관객들로부터 '현역조폭을 섭외했다'고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만큼 김준배가 영화 속에서 실감 나는 연기를 선보였다는 뜻이다.
<열혈남아>에는 오늘날 4편의 천만 영화를 포함해 총관객 1억 명을 돌파한 스타배우가 조·단역으로 출연했다. 바로 재문의 절친한 친구 민재를 연기한 류승룡이었다. 오프닝 장면에서 살해당하면서 회상장면을 통해서만 등장하는 류승룡은 의리가 깊은 건달로 자신이 살인에 대한 죄를 뒤집어쓰려 하다가 대식에 의해 살해 당한다. 출연분량은 많지 않지만 민재는 재문이 대식에게 원한을 갖게 된 원인을 제공한 중요한 캐릭터였다.
▲ <열혈남아>는 <아저씨>로 유명한 이정범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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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신하균, 한지민과 함께 드라마 <좋은 사람>에 출연한 조한선은 2004년 인터넷 소설을 원작으로 한 하이틴 영화 <늑대의 유혹>에서 반해원 역을 맡았다. 하지만 영화 개봉 이후 두 남자주인공 조한선과 강동원의 입지는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 신인에 불과하던 강동원이 '한국영화 3대 등장신'을 만들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반면에 조한선은 여주인공 이청아와 이어지는 캐릭터를 맡았음에도 강동원에 비해 상대적으로 돋보이지 못했다.
하지만 조한선은 2006년 설경구, 나문희 배우 등 대선배들과 함께 영화 <열혈남아>에 출연하면서 배우로 재조명받았다. 조한선은 <열혈남아>에서 태권도 유망주였지만 어머니의 병원비 때문에 조직세계에 발을 들인 초보건달 문치국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비록 <열혈남아>는 전국 57만 관객으로 만족할 만한 흥행성적을 올리지 못했지만 조한선은 <열혈남아>를 통해 2007년 춘사영화제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조한선은 2007년 <마이 뉴 파트너>와 2008년 <달콤한 거짓말>,2009년 <주유소 습격사건2>가 차례로 흥행 실패하면서 슬럼프에 빠졌다. 악역 변신을 시도한 <무적자>가 개봉한 2010년9월 사회복무요원으로 입대해 병역의무를 마친 조한선은 전역 후에 출연했던 <함정>과 <치외법권>, <돌아와요 부산항애>, <데자뷰> 등도 모두 흥행 실패하며 슬럼프가 점점 길어졌다.
그렇게 '한 때 잘나가던 배우'로 잊히는 듯했던 조한선은 2019년 드라마 <스토브리그>에서 드림즈의 4번타자 임동규 역을 맡아 좋은 연기를 선보이며 시청자들에게 오랜만에 자신의 존재감을 알렸다. 조한선은 지난 1월에 공개된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킬러들의 쇼핑몰>에서도 잔인한 킬러 베일을 연기했다. 최악의 슬럼프에서 악역연기로 활로를 찾은 조한선이 앞으로 또 어떤 작품에서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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