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신, 청소부, 매일 밤 독서... 어떤 남자인지 맞혀보시라
[김성호 기자]
완벽이란 무엇일까. 전국시대 조나라 재상 인상여와 얽힌 고사에서 나온 '완벽(完璧)'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흠 없는 옥을 뜻한다.
조나라에 유명한 보물 '화씨지벽'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진나라 소양왕이 성 15개와 보물을 바꿀 것을 요구하자 인상여가 사신으로 가길 청하며 한 말에서 따온 것이다. 인상여는 '성불입 신청완벽귀조(城不入 臣請完璧歸趙)', 즉 '성이 들어오지 않으면 신이 옥을 완전히 보전해 조나라로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정말 진왕이 약속을 지키려 들지 않자 기지로써 옥을 잠시 돌려받아 던질 듯 위협해 옥을 보전하는 데 성공했다.
성실히 사는 인간의 삶
▲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
ⓒ 티캐스트 |
<퍼펙트 데이즈>는 어떤 인간의 삶을 다룬다. 124분의 러닝타임 동안 그는 한 차례도 제가 사는 이유를, 제 삶을 지탱하는 힘을, 나아가는 목표 따위를 말하지 않는다.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저 그의 삶을 가까이서 바라보도록 할 뿐이다. 그의 삶은 어떤 모양인가. 어디에 머무르며 어디로 나아가는가. 영화의 관심은 오로지 그뿐이다.
그를 우리 시대의 언어로 적어보면 이쯤이 될 테다. 50대쯤으로 보이는 늙수구레한 남성. 청소부. 도쿄의 공공 화장실 청소 전문업체 소속. 독신. 도쿄 외곽 주택에 거주. 연락하는 가족 없음. 애인 없음. 따로 보는 친구 없음. 매일 아침 일찍 출근. 아침마다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아 마심. 점심은 공원에서 샌드위치로 때움. 청소를 마치고 목욕탕에 들렀다가 간단히 술 한 잔을 곁들인 식사를 함. 이따금은 술집을 찾기도. 단골 가게 두어 곳을 방문하는 편. 매일 밤 독서를 함. 차량 운전 중 카세트테이프로 음악을 들음. 필름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주변 사진을 찍어 기록함. 집에서 식물을 키움.
자, 이것이 영화의 주인공 히라야마(야쿠쇼 코지 분)에 대해 적을 수 있는 전부다. 나는 이밖에 그의 신상이며 일상에 대해 더 적을 것이 없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히라야마는 어떤 사람으로 다가오는가.
당신 무엇을 떠올리든 히라야마는 그와는 다른 이일 것이다. 히라야마라는 사람의 색깔과 온도가 위 사실엔 전혀 담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음악을 듣는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생각을 하며, 무엇을 찍는지를 나는 기록하지 않았다. 또 그가 어떤 자세로 청소에 임하며, 일을 할 때 어떤 표정이 되는지에 대해서도 나는 적지 않았다. 가게에선 어떤 분위기가 되는지를, 또 그를 대하는 다른 이들의 표정이 어떠한지도 나는 쓰지 않았다. 말하자면 정말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것일지 모른다.
알고 보면 달라진다, 이 남자가 그렇다
<퍼펙트 데이즈>가 보이는 것이 바로 이와 같다. 전자의 세계관에서 후자의 세계관으로, 전자의 가치관에서 후자의 가치관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히라야마라는 한 인간이 보낸 며칠을 뒤따르며, 한 사람이 무엇으로 표현되는지를 영화는 일깨우고 있다.
다시 적어보자면 이렇게 쓸 수 있겠다. 히라야마는 성실하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시간에 출근하며, 같은 시간에 퇴근하고, 그 후에도 같은 일상을 소화한다. 반복되는 삶에 불만을 갖기보다 그 안에서 소소한 행복감을 느끼고 만족한다. 새로운 자극을 향해 나아가기보단 주어진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삶, 가깝고 정다운 것들을 섬세하게 매만지는 태도를 그는 가지고 있다.
그가 모는 작은 승합차엔 직접 제작한 청소도구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하나하나가 제 방식에 꼭 맞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그는 공들여 대변기와 소변기, 세면대와 바닥 등을 닦아낸다. 보이지 않는 곳도 거울을 비추어 섬세하게 청소한다. 정성스럽다는 표현이 꼭 들어맞는 그의 청소방식은 가히 예술적이다. 히라야마가 청소한 화장실엔 히라야마가 묻어 있다. 말이 거의 없는 대신, 주변을 민감하게 느낀다. 표현보다는 수용에 익숙한 사람, 들어오는 하나하나를 그저 흘려보내지 않는 이가 바로 그다.
취향은 인간을 말한다
▲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
ⓒ 티캐스트 |
켜켜이 쌓여 눌린 취향은 보기보다 많은 것을 말한다. 윌리엄 포크너는 어떤가. 인간 내면에 대한 섬세하고 깊은 관심을 내보이지 않는가. 인화한 흑백사진을 선별하며 마치 장인이 흠 있는 도자기를 깨듯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을 좍좍 찢어버리는 모습도 그가 어떤 인간인지를 말한다. 그는 강단 있는 사내다. 분명한 취향과 지향이 있는.
물론 그의 삶이 기대만큼 잘 풀려온 것 같진 않다. 누가 태어나 처음부터 공중화장실 청소부가 되기를 꿈꾸었겠나. 포크너를 읽고, 벨벳언더그라운드와 패티 스미스를 듣는 이라면 더욱 그러했을 테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쉽게 마음을 다쳐가면서도 손을 뻗고 나아가려 하던 이가 아니었겠나.
그의 사연은 짐작될 뿐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이 이 영화 <퍼펙트 데이즈>와 작품을 쓰고 찍은 빔 벤더스의 미덕이다.
히라야마의 단조롭지만 완전한 듯했던 일상에 순간 균열이 가는 때가 있다. 처음은 가볍게. 여느 때처럼 화장실 청소를 하고 있는데 엄마를 찾는 아이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린다. 주의하지 않는다면 외면하기 딱 좋은 크기로, 그러나 히라야마가 누군가. 그는 몸을 일으켜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변기에 앉아 엄마를 부르는 아이를 찾는다. 아이의 손을 잡고 화장실 밖 공원에 나온 히라야마. 그런 그에게 멀리서 아이 엄마가 다가든다.
아이의 손을 빼앗듯 낚아채며 다그치는 엄마. 히라야마에겐 한 마디 말도 없이 물티슈를 빼어 아이의 손부터 닦는다. 히라야마는 화장실 청소부, 아이엄마는 대도시의 깔끔한 젊은 아줌마다. 멀어지는 모자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선 히라야마. 이런 일에 마음 상하기엔 그는 너무 많은 일을 겪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영화는 거기서 마쳐지지 않는다. 슬쩍 뒤를 돌아보는 아이, 그가 히라야마에게 손을 흔든다. 히라야마는 활짝 웃는다.
완벽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번째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 이번엔 함께 일하는 젊은 청소부다. 설렁설렁 일하는 뺀질이를 찾아 젊은 여자가 온다. 뺀질이가 어지간히 마음을 빼앗긴 모양, 그러나 그녀는 영 마음을 연 것 같지 않다.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면 차도, 돈도 있어야 한다는 뺀질이의 부탁. 히라야마는 끝내 차를 빌려주고, 주머니도 연다. 물론 뺀질이는 형편없는 녀석이다. 여자를 꼬시는 데도 실패한다. 그러나 히라야마에겐 꽤나 멋진 순간이 다가든다.
세 번째는 보다 전격적이다. 히라야마의 조카가 그를 찾아온다. 엄마와 싸운 뒤 가출을 했다고. 그로부터 펼쳐지는 이야기는 히라야마의 일상을 적잖이 흔든다. 그로부터 똑같은 듯하지만 전혀 다른 일상이 히라야마에게 펼쳐진다. 조카가 잠이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지나쳐 나무에 물을 주고, 아침에 캔커피를 두 개 뽑고, 점심 도시락도 두 개를 사고, 일이 끝난 뒤 목욕을 함께 가는 것이 그토록 큰 차이를 빚는다. 조카가 읽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을 다시 읽고, 동생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린다.
히라야마의 삶은 예기치 않은 일이 빚어지는 순간마다 작게, 또 크게 요동친다. '안온한 것 같은 독신의 삶, 규칙적이고 취향으로 가득한 그 삶이 결코 완벽하지 않음을 요동치는 순간들이 일깨운다. 그럼에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퍼펙트 데이즈'는 흔들림 없는 안온한 삶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흔들리고 눈물을 흘리고 실망하고 짜증도 나게 하는 일상을, 어쩌면 그를 오늘의 청소부로, 독신남으로, 말 없는 아저씨로 만든 인생을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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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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