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서 사랑받고 싶은 빈둥밴드입니다
[글쓴이 : 지리산작은변화지원센터]
산청지리산목화장터에서 막 공연을 마친 은진, 한나, 한범이 카페에 모였다. (아쉽게도 철규는 개인 사정으로 인터뷰에 함께하지 못했다.) 더운 날씨였는데도 지치기보단 신나 보인다. 평균나이 40대 중반인 이들에게서 그 달콤하고 은은한 에너지가 어디서 오는지, 또 이들의 음악은 어디에서 오는지 묻고 들어봤다.
▲ 산청의 목화장터에서 빈둥밴드가 공연하고 있다. 연주하는 은진. |
ⓒ 임현택 |
함양에는 마을 활력 공간 '빈둥'이 있다. 빈둥거리다 하나둘 모여든 동네 사람들이 그곳에서 어떤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기도 하고, 쿵짝쿵짝 재미있는 일을 벌이기도 하는 곳. 2017년 어느 날, 그곳에서 우쿨렐레 모임을 하고있던 빈둥지기 은진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주민 장기 자랑에 나가보지 않을래요?" 당시 시민사회단체가 함양 마천면에서 열릴 '제3회 용유담을 생각하는 모깃불 문화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넉넉(지리산작은변화지원센터 임현택 센터장)이 은진에게 장기 자랑 참가를 제안한 것이다.
은진은 빈둥에 드나들던 친구들을 불러 모아 함께 공연을 준비했다. 은진과 함께 우쿨렐레 모임을 하던 준영, 산내에서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던 라온, 학생 때부터 빈둥 단골인 데다 작곡을 공부하고 있던 청년 도영까지. 이렇게 네 사람이 '모깃불 문화제'에서 우주히피의 <어찌 그리 예쁜가요>를 부른 것이 빈둥밴드의 데뷔였다.
"무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따뜻한 시선 같은 게 느껴졌어요. 그게 좋더라고요. 그리고 그 장기 자랑에서 1등을 한 거예요. '우리 계속 해도 되겠는데?'하는 생각이 들고, 고무됐어요. 마을에서 우리가 이렇게 공연하는 걸 뿌듯하게 생각해 주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그러면서 장기 자랑 이후에도 계속 지역 행사에서 공연을 하게 됐어요. 멤버가 들고 나는 변화가 있긴 했지만 1년 반 정도 활동이 이어졌어요. 그러다 이사, 직장, 개인 사정 등의 이유로 멤버가 하나둘 흩어지면서 활동이 뜸해지게 됐죠." (은진)
▲ 산청의 목화장터에서 빈둥밴드가 공연하고 있다. 노래하는 한나. |
ⓒ 임현택 |
한나는 여덟 살부터 피아노를 쳤다. 집에는 피아노가 없었지만, 마음속 방 한 칸에는 늘 피아노를 들여놓고 살았다. 한나의 어머니는 어려운 형편에도 성악 레슨과 피아노 마스터 클래스까지 시켜주었다. 하지만 한나는 그 경험으로 일찍이 클래식 전공자의 세계에 벽을 느꼈다. 고등학생 한나는 종이에 피아노 건반을 그려 넣고 칠 만큼 음악을 사랑했고, 종이 건반을 치며 언젠가 서울에 가서 인디밴드 같은 걸 하고 싶단 꿈을 꿨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수업 발표를 하면서 인디 음악을 하고 싶다고 얘길 했었어요. 그러다 대학에 가선 영어교육과에 다니고 있었죠. 그런데 고등학교 친구가 저보고 '근데 너 왜 음악 안 해? 나는 네가 음악 할 줄 알고 계속 기다리고 있는데 안 해서 참 실망이야.' 이런 말을 했어요. 사실 그때의 저는 이미 교사가 되기로 완전히 마음을 먹었고, 고등학생 때 꿈꾼 인디 음악씬은 너무 멀게 보였어요. 내가 갈 수 없는 곳이라 생각했어요. 음악을 딱히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요.
그래도 음악 생활을 끊고 싶지 않아서 교회 반주는 계속했어요. 사실은 진짜로 제가 하고 싶었던 음악은 밴드였죠. 여러 대의 악기가 같이 어우러지고, 편곡도 하고, 신나는 음악도 하고, 관객을 막 들었다 놨다 하는 그런 걸 해보고 싶었어요."
빈둥밴드 공연을 처음 봤을 때, 한나는 카혼을 연주하는 은진을 보고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즐겁고 행복한 얼굴로 카혼을 두드리는 여인(은진)이 너무 멋있게 느껴졌다. 램프를 문지르자, 램프 속에 잠들어있던 지니가 깨어나듯 한나 안의 음악 영혼이 기지개를 켰다. '아, 저런 밴드 나도 하고 싶다!'
"제가 여태까지 밴드를 못한 이유는 둘 다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노래도 피아노도요. 왜냐하면 한쪽을 택한 친구들은 정말 잘하거든요. 보컬리스트를 생각했을 때 '나는 선우정아가 될 수 있나? 김윤아가 될 수 있나?' 키보디스트를 생각했을 때 '나는 정동환이 될 수 있나?' 못 되거든요.
그래서 '나는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예술의 영역은 그런 프로들의 세계라고만 생각했어요. 제일 잘하는 사람이 최고점을 보여주는 거. 그게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은진을 봤는데, 꼭 프로 뮤지션처럼 잘할 필요는 없더라고요. 행복한 얼굴로 음악을 하니까 충분히 듣기 좋았어요.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리고 '그런 음악이 절대 못하거나 나쁜 음악이 아니구나!' 하는 걸 깨달은 거죠."
▲ 산청의 목화장터에서 빈둥밴드가 공연하고 있다. 기타를 치는 한범. |
ⓒ 임현택 |
한범은 중학교 2학년 때쯤부터 교회에서 기타를 배웠다. 교회 반주를 하며 익힌 기타는 일상을 근사하게 만들어주는 좋은 친구로 늘 한범과 함께했다. 한나&한범 부부는 지인들과 함께 여러 해 동안 자신들의 집에서 작은 문예제를 열어왔다. (지금 와서 밝히지만 한나와 한범은 부부다!)
"'산아래 겸이네 문예제'에 온 사람들은 무엇이든 하나씩 준비해 와서 발표했어요. 시를 발표하거나 악기를 연주하곤 했죠. 제가 기타를 연주하고, 한나가 피아노를 치기도 했어요. 산청에 이사 와서도 열었는데, 멀리 사는 친구들을 이곳까지 부르는 게 어렵기도 하고, 제 생활이 바빠지면서 더 이상 열지 못했어요."
그러던 차에 한범도 상림공원에서 빈둥밴드 공연을 보게 됐다. 물론 한나와 함께였다. 한나가 은진에게 반하는 사이, 한범도 이런 생각을 했다.
"너무 부러운 거예요. 혼자 기타 치는 것도 좋았지만, 밴드라는 형태가 너무 즐거워 보였어요. 그래서 저도 끼고 싶다, 저런 걸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 산청의 목화장터에서 빈둥밴드가 공연하고 있다. |
ⓒ 임현택 |
그로부터 한두 해가 흐르고 빈둥밴드 1기가 사실상 해체 상태로 접어들었을 무렵, 한범과 한나가 먼저 은진에게 빈둥밴드의 부활을 제안했다. 이때쯤 산청·함양 활동가들은 월례 네트워크 모임을 통해 활발히 교류하고 있었는데, 한범과 은진은 만나는 날마다 이런 얘길 주고받았다. "우리 같이 밴드 하자." "그래, 하자. 해보자." 그러다 2022년 봄, 은진이 만남을 적극 추진하면서 진짜로 밴드를 시작하게 됐다. 2022년 가을, 진주 녹색당 후원행사 무대에 서며 빈둥밴드 2기가 데뷔했다.
처음에는 중학생 멤버 2명이 보컬과 베이스로 함께했다. 그러나 세대와 취향 차이로 곧 각자의 길을 걸으며 서로를 응원하기로 하고 빈둥밴드에는 지금의 은진, 한범, 한나가 남았다. 빈둥밴드 1기에서도 활동했던 철규도 객원으로 자주 참여하다가 자연스럽게 멤버로 정착했다. 로컬 뮤지션을 덕질하는 특별한 기쁨과 보람 중 하나는 웬만하면 성덕이 될 수 있다는 점인데, 한범과 한나도 바람직한 덕업일치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은진 : 카혼을 연주하며 낙관을 맡고 있습니다
은진은 리듬악기를 주로 맡고, 가끔 코러스나 보컬도 한다.
"처음엔 장구로 시작했었는데, 빈둥밴드를 하면서 카혼을 사게 됐어요. 그래서 카혼을 주로 연주하고, 심벌, 탬버린, 쉐이커 같은 리듬악기를 중심으로 연주해요. 화음을 만들어 함께 노래하기도 하고요. 특별히 음악을 했던 경험이 있는 건 아니라서, 빈둥밴드 1기 활동할 땐 유튜브 보면서 한 곡 할 때마다 새로 연습해 가면서 했어요. 대학생 때 춤패 활동했던 게 음악 생활에도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좋아', '이렇게 해볼까?', '어떻게든 될 거야.' 긍정과 낙관의 기운을 퍼뜨리는 은진은 멤버들 사이에서 밴드 활동이 너무 무거워지지 않게, 즐거움을 잃지 않게 하는 길잡이가 되어준다. 관객 역시 늘 느긋하고 편안한 미소를 띈 무대 위의 은진을 보며 편안하게 무대를 즐기게 되고, 은진이 두드리는 악기의 리듬을 따라 고개와 발끝을 끄덕이며 그 음악에 스며들게 되니까 관객들의 길잡이이기도 하다.
한범 : 기타를 치고 근심과 성실을 맡고 있습니다
"저는 이전까지는 늘 똑같은 기타를 쳤어요. 코드 잡고 스트로크 아니면 아르페지오 하는 정도만 좋아했어요. 그 이상의 기술들은 잘 알지도 못했고요. 옛날부터 김광석이나 동물원 노래 같은 걸 많이 연주했죠. 몇 해 전부터 유튜브를 보면서 다양한 연주 형태들이 더 있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그때부터 새롭게 연습하다 보니 깨작깨작 멜로디도 좀 더 섞을 수 있게 되고, 이 나이에도 늘긴 는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뭘 더 해보고 싶단 생각도 들고요. 그러던 차에 빈둥밴드에 합류한 거죠."
한범의 성실이야 한범을 아는 사람이라면 '두말하면 잔소리'라고 여길 부분이다. 근심은 어쩌다 맡게 된 걸까.
"처음에는 빈둥밴드 1기의 계보를 잇는 줄로만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는 어쿠스틱 기타만 쭉 할 거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중학생 멤버들이 있을 때 데이식스의 '예뻤어'라는 곡을 연습하면서 덜컥 일렉기타를 잡게 됐어요.
어쿠스틱 기타는 울림을 더 오래 유지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면, 일렉기타는 소리를 죽이는 게 되게 중요해서 꼭 필요한 소리 외에는 잘 잡아주는 게 너무 중요한데 저는 그런 연습이 전혀 안 되어 있었던 거죠. 잡는 방법도 확 달라지는 거고요. 사실 되게 힘들었고 지금도 힘들…"
각고의 노력이 있었다는 은진의 증언과 부담인 줄 알면서 퀄리티를 높이라 압박했다는 한나의 빠른 사과로 한범은 눈물을 거두고 말을 이어갔다.
"자작곡은 우리가 합의해 소리를 만들어 나가니까 그나마 괜찮지만, 원곡이 있는 경우에는 기타가 메인을 차지하는 부분에서 핵심을 잘 살려줘야 하거든요. 근데 그게 되게 어려워요. 그런 과정에서 나는 기타를 되게 못 치는 사람이란 느낌도 들고, 뭘 하나 새로 하자고 하면 그때부터 근심이 쫘악 솟더라고요. 지금은 연습하는 만큼 근심을 깎아 나가고 있어요."
한나 : 노래를 부르고 작사와 작곡, 쓴소리를 맡고 있습니다
"처음엔 메인 보컬 없이, 모든 멤버가 한 소절씩 노래를 부르기로 했었어요. 그렇게 해보니 '저 사람은 이제 기타만 치게 하자.', '저 사람은 노래 좀 더 시켜도 되겠네.' 같은 결정이 자연스럽게 난 거죠. (모두 웃음) 연습을 거듭하면서 각자의 주력 포지션이 만들어진 것 같아요. 저는 성악도 하긴 했었고, 동요 대회도 나가봤고, 노래 욕심이 없진 않았어요. 노래하는 걸 항상 좋아했어요."
한나는 마치 이사님처럼 분명하고 조곤조곤한 말투로 바른 말과 쓴소리를 하기도 하고, 일상에서는 소녀처럼 반짝이는 순간들을 발견하고 몽글몽글 수채화 같은 노래로 만들어내기도 하는 빈둥밴드의 열정 멤버다.
지금까지 발표된 빈둥밴드의 자작곡들은 한나가 작사, 작곡했다. 초등학생 때 담임선생님이 내주신 동요 만들기 숙제를 한 것이 첫 자작곡이었다. 그 후로 한범과 연애하던 시절 놀이처럼 만든 여덟 마디 노래들, 선배의 결혼식에서 불러준 축가를 거쳐 지금의 빈둥밴드 자작 명곡들이 탄생했다. 기억나는 짧은 노래를 들려달라 청했더니 한나가 몇 곡을 떠올려 불러주었다. "아침에 아침 먹고 점심에 점심 먹고 저녁엔 저녁 먹지요", "세상엔 수많은 폭탄이 있어 그건 바로 너와 나"
▲ 산청의 목화장터에서 빈둥밴드가 공연하고 있는 뒷모습. |
ⓒ 임현택 |
밴드에 진심이었던 한나는 연습과 공연을 해나가며 '우리 노래가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게 됐고, 좋아하는 걸 음악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자 일상 곳곳에서 영감이 삐죽삐죽, 그리고 퍽퍽 터져 나왔다. 명랑한 분위기의 첫 자작곡 <후투티>는 한나가 교사였을 때, 야간 자율학습을 감독하다가 '더이상 이렇게는 못 살겠다!'하고 터져 나온 영감으로 만든 노래다.
때론 삶의 무게에 짓눌려 이대로 바스러져 버릴 것 같을 때
오늘 끝내지 못한 일과 내일 끝내야만 하는 일을 떠올리며 한숨 지을 때
훗훗훗 웃어 볼까
훗훗훗 날아 볼까
두 번째 자작곡 <Dear Bob>은 함양 근처 국도를 지나다가 너무 예쁘게 물든 단풍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
"풍경을 보고 밥 아저씨가 같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그리고 싶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즈음 많이 듣던 노래가 백예린이 리메이크한 <산책>이라는 노래였는데, 그렇게 은은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노래를 만들었어요."
가사의 내용뿐 아니라 그걸 표현하는 소리에도 진지한 고민과 소신이 담겨있다.
"시골에 살면서 자연스러운 걸 추구하고, 어쿠스틱 음악을 많이 듣게 되잖아요. 그런데 결국 전자장비가 동원되지 않으면 관객들은 들을 수가 없어요. 전자악기에 대해서도 꺼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후투티>에도 일렉 기타가 들어가고, <Dear Bob>에도 몽글몽글한 소리를 표현하고 싶어 전자피아노를 연주했어요."
아저씨 내게는 그림도 삶도 참 쉽지만은 않았어요
그래도 나는요 이곳에 살며 아저씨 맘을 닮게 됐죠
눈덮인 천왕봉 반달곰 가족이
구상나무 숲 사이 노오란 히어리가
남기고픈 풍경이 나누고픈 그림이 되고
나도 행복한 한 조각 구름으로 더해지고 싶은걸요
인터뷰한 날 기준으로 최신곡인 <Herb People>은 지리산권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활동가들에 대한 노래랄까.
"겉모습은 되게 후줄근한데 얘기를 해보면 너무 멋있어서 나도 닮고 싶어지는 그런 사람들, 매끈하고 예쁜 사람들로 가득 찬 도시에서는 흔히 볼 수 없었던, 여기서 만난 특별한 때깔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에요."
잎사귀가 풍성한 당근 한 다발
2024그램 현미쌀을 달아 파는
그들의 장터엔 애플민트향이 흘러
그건 아마 굳은살로 박힌 삶의 품위
그들과 몸을 스치며 살면 나도 어떤 향이 스며들게 될까
지하철을 잡으려고 내달리다 어깨를 부딪히며 아스팔트 냄새 나던 내게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워가고
느린 걸음으로 소중한 걸 지키고 살면
내 노래엔 바질향이 날까
주로 한나가 작사, 작곡을 해오면 한범과 은진이 채워주고 함께 다듬으며 완성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 대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이야기를 좀 더 피부에 와닿는 느낌으로 전달하고 싶어요."(한나)
"저희 음악에 굉장히 로컬한 것이 그대로 호출되면 좋겠어요. '벼룩시장'이 아니라 '목화장터'라고 하는 것처럼요. 그런 걸 통해서 누군가는 호기심도 생길테고, 노래 속에서 아는 걸 발견하는 사람들은 반갑기도 할 거에요." (은진)
▲ 산청의 목화장터에서 빈둥밴드가 공연하고 있다. 관객들의 모습. |
ⓒ 임현택 |
최근 들어 공연 섭외도 꾸준히 들어오는 편이다. 그들이 사랑받고 싶은 '동네' 곳곳에서 행사가 열리고 음악이 필요할 때, 빈둥밴드를 찾는다. 주로 산청, 함양, 남원에서 공연했지만, 더 먼 곳으로도 언제든 갈 준비가 되어 있다.
빈둥밴드 무대 뒤의 마음, 연습에 진심, 소리에 진심
"그전까지는 크게 욕심 없이 합주 자체에 의미를 두고 2주에 한 번씩 연습했어요. 그러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공연 섭외가 많아지면서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연습량을 늘렸어요. 함양 빈둥이나 산청 명왕성에서 매주 모여 연습하죠."(한범)
연습 장비 세팅에만 30분이 걸린단다. 거기에다 한범은 영상 촬영, 편집까지 하며 유튜브 채널 <반달이와 빈둥밴드>도 운영하고 있다. 연습 영상이나 공연 영상이 주로 올라오는데, 그 퀄리티도 꽤 높기 때문에 팬들의 만족도 역시 매우 높다.
"제가 밴드 활동을 하면서 중요하게 여기는 건 소리의 균형이에요. 미미한 차이지만 소리가 아쉬울 때가 꽤 많거든요. 연습하면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균형잡힌 음향을 만들고 싶어요. 현장에서는 둘쑥날쑥할 수 밖에 없지만, 사람들이 적어도 유튜브에서는 잘 정돈된 소리를 들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추구하는 '완성된 소리'의 기준을 세우고 싶고, 거기에 집중해 보고 싶어요."(한범)
빈둥밴드의 살림법, 돈 벌려고 하는 일은 아니지만...
"공연비를 조금씩 받는데, 그 공연비를 어떻게 분배하느냐가 되게 재미난 문제거든요. 지금 우리는 공연비의 20%는 밴드 통장에 적립하고, 나머지는 n분의 1로 나눠 가지고 있어요. 워낙 알뜰한 사람들이라 밥도 자주 해 먹고요. 밴드에 필요한 장비나 사고 싶은 개인 악기가 있으면 50% 정도를 밴드 통장에서 지원해주고 있어요.
공연에 드는 연습 비용과 시간을 따져 시급으로 계산해보기도 하고, 세대 구성에 따라 차등을 두어야 할까, 작곡이나 음향 장비 세팅 등 맡은 역할에 따라 차등을 두어야 할까 여러 방식을 고민해 봤는데, 이 문제가 참 재밌는 것 같아요."(은진)
"밴드 내부에서도 고민하지만, 공연을 기획하고 초대하는 입장에서도 그런 기준들을 세워둘 필요가 있어요. 그런 기준들을 잘 알려주고 섭외하는 것도 예의인 것 같고요. 그런 문화가 정착되어 있으면 뮤지션 입장에서도 금액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우리의 활동을 인정해 주고 있구나.'하고 받아들일 수가 있죠."(은진)
지역에서, 특히 지역민들이 하는 공연에 대해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문화가 필요하다. 프로 뮤지션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취미생활을 뽐낼 수 있는 기회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히 큰 실례다. 어떤 무대이든 조금이라도 감사의 마음을 표현할 기회를 만들면 우리도 더 훌륭한 기획자, 더 훌륭한 관객으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은 적어도 이들의 정성과 노력과 재능은 절대 가볍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될 거라 믿는다. 공연 기획 얘기까지 흘러갔다니, 빈둥밴드의 멤버들이 못 말리는 활동가들임을 잊어선 안 된다.
밴드로 활동하고, 활동으로서 밴드 하기
은진은 주로 마을 모임을 인큐베이팅하고, 소통을 촉진하는 기획자로 활동했다. 꼭 밴드를 하고 싶었다기보다는 마을 모임을 촉진하고자 우쿨렐레 모임을 열었고, 그러다 지역 행사에 초대받으면서 마을 활동으로서 밴드를 시작하게 된 거다. 은진은 어떤 마음으로 밴드 활동을 이어가고 있을까.
"합창 같은 거 하면 화음이 잘 맞을 때 막 좋고 소름 돋는 거 있잖아요. 그냥 듣기만 할 때와는 또 다르게. 밴드도 마찬가지에요 합주한다는 게 엄청 즐거운 일이란 말이죠. 우리가 뭔가 함께 만들어내는 활동이 주는 충만함이 있어요. 또 이렇게 만든 걸 마을의 필요에 의해서 공연하기도 하잖아요. 그런 게 좋아요. 저는 밴드랑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런 활동을 하는 게 신기하기도 해요. 협업하고 기대어서 한다는 게 잘 맞고 좋아요. 원래 노래 부를 때 부끄럽고 얼굴이 빨개지고 그랬는데, 지금은 잘하는 보컬에 기대어 묻어가고, 우리 음악을 더 풍성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그런 게 저랑 잘 맞았어요."
지역의 필요에 기여하는 경험, 소비자에서 생산자 되는 경험, 음악으로 촉진하기
한범은 산청 청소년 자치 공간 명왕성에서 코디네이터이자 청소년 활동을 촉진하는 활동가다. 밴드를 하면서 청소년 밴드에 대한 관심도 더 커졌다.
"청소년 밴드 활동은 지역에 문화예술이 폭넓게 펼쳐지기 위한 좋은 바탕이 될 수 있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역에서 공연할 기회도 많이 만들어주고 싶고, 제가 밴드를 하면서 배우는 것들을 잘 연계하고 지원하고 싶어요."
인터뷰가 있던 날에도 산청 지리산 목화장터 공연이 끝나니 무대 위에서는 바로 카혼 워크숍이 열렸다. 나이와 성별과 직업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이 무대에 둥그렇게 앉았다. 은진이 먼저 시범을 보이면 곧 참여자들이 그 리듬을 따라 카혼을 두드렸다. 누구든 참여할 수 있는 워크숍 하나로 공연도, 장터도 훨씬 풍성해졌다.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경계, 무대 위아래의 경계를 넘나들며 함께하는 경험을 만들어가는 것. 활동과 음악을 잇고 엮는 것. 빈둥밴드의 행보가 더 기대되는 이유다.
워크숍을 진행했던 은진은 이렇게 말한다.
"예술도 잘해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전환되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좀 더 지역에 많아지면 좋을 것 같거든요. 아까 워크숍을 한 것도 우리가 했던 걸 나누는 작업이고요. 그게 쉽지만은 않은데, 그래도 어떻게 이 좋은 걸 사람들도 경험할 수 있게 나누면 좋을까 생각해요. 좀 더 해보고 싶어요. 촉진가로 활동하고 있어서인지, 음악으로 촉진하는 것에도 관심이 많아요. 공연이 아닌 형식으로도 사람들과 음악을 함께하고 싶어요."
향후 계획은
빈둥밴드는 7월 20일 함양 상림공원에서 1시간짜리 버스킹 공연을 준비 중이며, 여기서 신곡 <Glow>를 발표할 예정이다. 8월 1일에는 산청 청년모임 '있다'가 주최하는 토크 콘서트에 출연한다. 단독 공연도 꿈꾸지만, 아직 논의 단계에 있다. 내년에는 EP 앨범 정도를 만들 수 있는 실력과 곡을 갖추는 것이 목표다. 멤버들도 막상 인터뷰하면서 서로가 생각하는 빈둥밴드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된 듯했다.
앞서 한범과 은진이 말한 것 말고도 이들은 인터뷰 내내 많은 꿈과 목표를 이야기했다. 한나는 다른 지역 뮤지션들과 교류하는 자리를 만들고 싶다고 했고, 은진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좋은 곡들을 커버하면서 그 뮤지션이나 곡을 빈둥밴드를 통해 더 알리고도 싶으며, 자작곡들은 특히 더 많은 여지가 남아있으니 계속 연구하며 더 나은 음악으로 빚어가고 싶다고 했다. ("처음 만든 곡인 <후투티>에는 전주가 없는데, 어쩌면 전주가 생길지도 모르는 거죠.")
빈둥밴드 2기는 2022년의 한나가 한범에게 던져본 '우리, 밴드나 할까?'라는 낙서에서부터 은진을 만나 현실이 되기 시작했다. 이들이 오늘 낙서처럼 신나게 쏟아낸 꿈들도 언젠가는 현실로 마주하고 있을 것 같은 예감이 확신처럼 든다.
진행 :넉넉 (남원), 글: 푸른 (산청).
작가 푸른
내 이름도 별명도 살고 싶은 모습도 '푸른'. 나는 따뜻하거나 뜨거운 사람.
어린이의 벗 되어 살고 싶다. 어린이 해방을 꿈꾸며 산청에 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인터뷰 프로젝트는 '임팩트 그라운드'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재단법인 브라이언임팩트가 후원하고 사회적협동조합 지리산이음이 기획, 운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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