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한국대사관저에 이 사람 현판식…'방적왕'의 조국 사랑
“다정했던 할아버지를 요즘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를 텐데, 자료를 모아 대사관에 있는 기념관을 더 충실히 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지난 11일 일본 도쿄(東京) 도심의 한 화랑. 고(故) 서갑호(1915~76) 회장의 손녀 사카모토 사치코(54)를 만났다. “한국 대사관이 이렇게 큰 곳은 세계에서도 별로 없다면서요?” 눈을 반짝이던 그는 해외에 있는 대사관에 ‘이름’이 붙는 것이 드문 일이라는 말에 두 시간 남짓 조부의 이야기를 쉴새 없이 이어갔다. 사카모토를 만나게 된 건 이튿날 열린 주일 한국 대사관저의 이례적인 현판식 때문이었다. 관저에 '동명재(東鳴齋)’란 이름이 붙었는데 ‘동명’은 사카모토의 조부인 서 회장의 아호다.
‘방적왕’이 마지막 황태자를 위해 산 땅이
경남 울주군 삼남면에서 태어난 서 회장은 14세에 홀로 일본에 넘어와 폐지 수집, 수건 공장 근무 등 궂은일을 마다치 않았다. 사업수완이 좋아 1948년 방직회사(사카모토 방직)를 일본서 세웠다. 50년대엔 일본서 소득세를 제일 많이 낼 정도로 성공한 동포로 꼽혔다. 재일동포 중에선 처음으로 63년 엔화를 한국으로 들여와 방림방적 회사를 세워 한국 섬유산업을 키운 밑거름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 그가 주일 대사관부지를 사들이게 된 건 영친왕 이은(1897~1970) 때문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볼모로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 왕족의 일원이 됐던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이 1947년 일본 국적을 박탈당해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됐단 소식을 접하곤 걱정이 들었다.
서 회장은 당시에도 '금싸라기 땅'으로 불렸던 덴마크 공사관 자리를 사들였다. 영친왕이 기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사카모토는 “다만 왕자는 우여곡절 끝에 해당 부지가 아닌 호텔에 기거하게 됐고, 조부는 조국의 왕자를 위해 사둔 토지를 한국 대표부에 무상으로 빌려줬다”고 설명했다. 서 회장은 62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직접 만나 한국 정부에 아예 토지를 기증했다. “조국의 동포들이 부끄럽지 않도록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신 것 같다”는 사카모토의 설명이 이어졌다.
회사의 부도와 화재
하지만 조국을 아꼈던 서 회장의 삶에는 굴곡이 이어졌다. 74년 경영난으로 일본 회사가 부도를 맞았다. 사카모토는 “당시 조부와 부친이 한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고 들었다”며 안타까워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경영을 이어갔지만, 같은해 화재가 발생했다. 76년 서울 삼청동 자택에서 서 회장이 숨을 거두면서 서 회장의 ‘방적왕’ 신화는 끝이 났다.
서 회장이 다시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 건 2013년이다. 그가 생전 기증한 대사관 부지(약 1만202㎡)에 지상 7층 지하 1층 규모의 청사와 대사관저가 들어서면서다. 당시 개관식엔 서 회장의 차남이자 사카모토의 부친인 서상욱 씨 등 유가족이 함께 참석했다.
현재 남은 가족 중 유일하게 서 회장의 일본 자택에서 태어났고, 서울 삼청동 자택에서도 6세까지 함께 살았던 사카모토는 이후 조부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대사관엔 서 회장의 훈장 등 자료가 모인 기념실인 '동명실'이 있는데, 사카모토도 대사관저 개관식 때 잠시 들어갔을 뿐 이후엔 대사관 내부라 일반인 신분으론 들어갈 기회가 특별히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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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젊은이들 교류 늘어나갈 바라”
사카모토는 “그릇을 깨도 혼내기보다 '잘했다. 나도 그릇을 사고 싶었던 차였고 그릇을 우리가 사야 그릇 장수도 먹고살 수 있다. 그게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할 정도로 다정했던 조부를 보고 싶고, 알고 싶었다”고 했다. 이에 용기를 내 대사관에 직접 연락했고, 지난해 윤덕민 주일 대사와 만나게 되면서 약 10년 만에 조부의 기록이 담긴 기념실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우스갯소리지만 과연 나였다면 조부처럼 기부를 할 수 있을까 싶다”면서 “가난했던 시절에 돈의 값어치로도 매길 수 없는 기부라고 생각한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사카모토의 바람은 단 하나. 살아있는 동안 “조부의 이야기가 미래 세대에 잊히지 않도록 자료를 모아 남기는 것”이라고 했다. “이번 동명재 현판이 붙으면서 방문객들이 알게 되는 기회가 늘어 매우 감사하고 기쁘게 생각한다”라는 소감도 보탰다. 지난 12일 열린 현판식에 아직 고등학생인 조카도 참석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바람을 전한 것도 그였다. 미래를 책임질 한 사람이라도 더 이런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한류 붐으로 일본과 한국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고 있다”며 “한·일 젊은이들의 교류 기회가 늘어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도쿄=김현예 특파원 hy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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