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보다 사람이 중요해"…'삼성스럽지' 않았던 갤럭시 언팩 [현장에서]
삼성은 모처럼 ‘삼성스럽지’ 않았다. 지난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갤럭시 언팩에서 삼성전자 모바일(MX) 사업부가 보인 행보다. 폴더블(접는) 인공지능(AI) 스마트폰 갤럭시Z폴드6·플립6 등 신제품을 공개한 삼성은 기술보다 사용자 중심, 단기보다 장기적 접근, 추수보다 파종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AI 주도권 ‘하드웨어 컴퍼니’로
오픈AI의 챗GPT 등 거대언어모델(LLM)이 열어젖힌 AI 혁명은 역설적으로 다시 ‘하드웨어의 시대’를 불러왔다. AI를 훈련·추론할 컴퓨팅 인프라, AI를 소비자에 제공하는 엣지 디바이스(스마트폰·PC 등) 모두 하드웨어다. 최고 성능 LLM을 보유한 오픈AI·구글보다 엔비디아가 먼저 AI로 막대한 수익을 내는 배경이다. 이제 막 열리는 AI 서비스 시장에서도, 스마트폰으로 사용성·전력·비용 최적화된 AI 킬러 서비스를 누가 내놓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이번 언팩에서 삼성전자와 구글은 양사가 공동 개발한 AI 검색 ‘서클 투 서치’의 개발 과정을 공개했다. 최원준 삼성전자 부사장은 “우리는 사용자가 폰을 사용하는 방식에 대한 깊은 이해를, 구글은 검색 전문성을 테이블에 들고 나왔다”라고 말했다. 삼성의 하드웨어 강점이야말로 빅테크 구글을 협력 테이블에 마주 앉힐 무기라는 것과, 여기엔 단지 ‘기술’뿐 아니라 ‘사용자 이해’가 중심이 돼야 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만들 수 있다’보다 ‘왜 필요한가’
화웨이·샤오미 등 중국 업체들의 1분기 폴더블폰 판매량은 삼성보다 많았고, 아너는 ‘세계에서 가장 얇은 폴더블폰’을 냈다. 그러나 테크 시장은 ‘우린 이런 것 만든다’ 외치는 기업이 아니라, ‘사용자는 이걸로 뭘 한다’ 보여주는 기업이 주도해 왔다. 엔비디아는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들고 ‘그래픽 처리 잘한다’가 아니라 ‘AI 병렬 연산을 할 수 있다’를 줄곧 보여준 끝에 AI 시장을 리드하고 있다.
삼성은 이번 갤럭시 폴더블 신작에서 ‘왜 스마트폰을 접어야 하는가’에 답을 더했다. 화면을 두 배로 활용할 수 있는 폴더블 폼팩터(기기 형태)의 특성을 AI의 소통·생산성 기능에 맞게 살린 ‘실시간 통역 대화모드’ ‘AI 문서 편집·요약 비교’ 등의 새 기능이다. 2019년 이후 ‘폴더블 폰 6년차’ 삼성의 사용자 연구가 돋보인 부분이다.
단기 실적, 내부 경쟁 넘어 ’씨 뿌리는 삼성’으로
“계열사·사업부끼리 협력보다 경쟁한다”, “가진 건 많은데 시너지가 안 난다”… 삼성전자 전현직 임원들이 말하는 최근 삼성의 문제다. 전문경영인이 회사를 위한 장기적 결정을 내리도록 동기 부여가 안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삼성의 행보는 고무적이다. 노태문 MX사업부장(사장)은 언팩에서 “갤럭시 AI 지원 기기를 연내 2억 대로 늘리겠다”며 출시 3년 반이 지난 갤럭시S21에까지 일부 AI 기능을 지원하겠다고 밝혔고, 구글과 함께 확장현실(XR) 전용 운영체제(OS)와 소프트웨어개발도구(SDK) 등 콘텐트·서비스가 생겨날 플랫폼을 곧 내놓는다고 했다. ‘기기 출시보다 생태계 조성이 먼저’라는 판단에서다. 모두 단기 성과를 위한 결정은 아니다.
“한국은 ‘있는 시장’에, 미국은 ‘없는 시장’에 투자한다.” 한 딥테크 스타트업 회사 대표가 규정한 양국의 투자 차이다. 미국은 없는 시장을 만드는 게임 체인저에 돈이 몰리지만, 한국에선 이미 성공한 모델의 후속으로 ‘제 2의 ◯◯◯’을 선호한다는 것. 어느 쪽이 시장을 주도할 지는 말할 필요가 없다. 한국의 오랜 숙제를 삼성이 모바일 AI에서 풀어 나가기를 기대한다.
파리(프랑스)=심서현 기자 shsh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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