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욱의 시시각각] MB·박근혜 땐 있고, 지금은 없다?
"장돌뱅이(전국을 도는 상인을 낮춰 부르는 말)는 안 된다고, 장돌뱅이가 어떻게 대통령이 되냐고 얘기를 한다는데, 참 기가 막히고 가슴이 아프다."
2007년 5월 16일 그날은 하루 종일 비가 쏟아졌다. 그날 밤 강릉 경포대의 호텔 레스토랑 5평 남짓한 방에 그의 탁한 음성이 후두둑 빗소리를 뚫고 퍼졌다. 주인공은 대선 출마를 선언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았던 이명박 전 대통령(MB)이었다. 인터뷰는 MB의 강원도 지역 방문 일정 도중에 급하게 성사됐다. 서울에서 '총알택시'를 타고 온 당시 중앙일보 정치부장에게 MB는 한나라당 내 친박(친박근혜)계 의원이 기업인 출신인 자신을 '장돌뱅이'라고 부른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대선후보 결정을 3개월여 앞둔 당시는 친이계와 친박계로 갈린 보수 내전의 상황이었다. 양 진영의 폭로와 갈등, 네거티브가 춤을 췄다. 진보 정권 10년의 끝자락에서 보수 세력 정권 탈환의 기운이 어느 때보다 강했다. 경선 승리가 곧 청와대행을 의미했다. 양 캠프 소속 의원들은 물론 출입기자들에게도 '친이'와 '친박'의 딱지가 붙었다. 필자가 담당했던 MB 캠프의 술자리에선 "오빠! 먼저!(박근혜는 차기)"가 대표 건배사였다. 친이계 인사가 여의도 국회 본청 앞에서 참새와 충돌하자 "친박 참새의 공습"이란 우스갯소리가 돌 정도였다. 승부는 1.5%포인트 차 초박빙이었다. "경선 과정의 모든 일들 잊자. 하루아침에 잊을 수 없다면 며칠, 몇 날이 걸려서라도 잊자"는 패자의 역사적인 '승복 선언'이 승자의 연설보다 더 주목받았다. 물론 그게 전쟁의 끝은 아니었다. MB 재임 시절에도 18대 총선 친박계 학살 공천 논란, 세종시 수정 등의 문제로 끊임없이 갈등했다. 하지만 둘은 결정적인 선을 넘지 않았다. 머리가 터지게 싸우다가도 담판과 협상으로 희한하게 돌파구를 열었다. 이런 방어 기제가 작동하면서 결국 보수 진영은 두 번 연속 대권을 거머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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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한 충돌에도 돌파구 모색한 둘
보수 공동체 궤멸 막고 연속 집권
막장 전대와 윤·한 갈등의 결말은
」
3년간의 특파원 생활을 마치고 2014년 서울로 돌아온 뒤 대통령직에서 퇴임한 MB에게 '박근혜 대통령 당선'에 대한 소회를 물어본 적이 있다. 가물가물하지만 이런 취지의 대답이 돌아온 걸로 기억한다. "내 주변에도 '박근혜 당선은 안 된다, 기를 쓰고 막아야 한다'는 사람이 있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어쨌거나 나라를 위해선 보수 진영이 이기는 게 맞았다."
그런 심정은 박근혜 전 대통령도 늘 마찬가지였으리라. 보수 공동체와 보수 가치에 대한 책임감, 공동체 공멸에 대한 우려가 연속 집권의 밑거름이 됐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들 두 전직 대통령이 검사로서 자신에게 칼을 겨눴던 윤석열 대통령이나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에게 비교적 관대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도 보수 공동체에 대한 일종의 배려로 보인다.
현재 진행 중인 국민의힘 전당대회와 윤·한 갈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현재권력과 미래권력에 따로 줄 선 이들의 권력투쟁에, 대표 경선 후보들의 자폭적 언어들, 여기에 대통령 부인 이슈까지 엉망으로 뒤섞이며 앞이 안 보이는 막장극으로 치닫고 있다. 댓글팀의 존재나 대통령 부인의 당무 개입 논란 등 국기문란의 영역에 속하는 내용까지 연일 까발려졌다. 여권의 대표적 두 지도자가 무대 뒤에선 무려 7개월에 걸쳐 '김건희 여사 특검법' 문제로 심각한 갈등을 빚어왔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보수 공동체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감이나, 보수 정치인으로서의 동업자 의식도 잘 보이지 않는다. "우린 (원래) 좌파"라는 대통령 부인의 과거 발언이 왜 소환되는지, 검사 출신 등장인물들에게 '보수든 진보든 상관없이 팬덤에 업혀 나만 출세하면 된다는 생각 아니냐'는 의심이 왜 쏟아지는지 당사자들이 돌아봐야 한다. 맥락 없는 격노와 증오, 한 톨의 손해도 볼 수 없다는 듯한 협량과 말싸움 기술이 정치의 중심에 서버렸으니 '보수의 품격'이 참으로 처량해졌다.
서승욱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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