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호 논설위원이 간다] “업종별 차등적용? 지금 결정 방식으론 논의조차 힘들다”
전국 단위의 노사 임금 흥정이 돼버린 최저임금
2019년 7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을 사과했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대통령의 발언을 전하는 방식이었다. 그때 최저임금위원회(최임위)가 결정한 이듬해 2020년 최저임금 인상률은 2.87%, 최저임금 시급은 8590원이었다. 공약 불발이 확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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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등적용 업종의 임금 자료 등 판단에 필요한 데이터도 없어
전문가 참여 늘리고 정부는 뒤에 숨지 말고 책임 있게 결정을
최저임금위 상설화, 국가임금위원회 전환 등 개선책 내놔야
」
대선 후보들의 최저임금 1만원 공약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은 문재인 대통령만 약속한 게 아니었다. 2017년 19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모든 후보자의 공약이었다. 문재인(더불어민주당)·유승민(바른정당)·심상정(정의당) 후보는 2020년까지, 안철수(국민의당)·홍준표(자유한국당) 후보는 대통령 임기 내인 2022년까지 달성하겠다고 시점만 달리 약속했을 뿐이다.
문재인 정부는 2007년(12.3%) 이후엔 없었던 두 자릿수 인상률로 2018년 16.4%, 2019년 10.9%의 최저임금 ‘과속 스캔들’을 벌였다. 인상액 기준으로도 전무후무한 규모였다. 2018년 1060원, 2019년 820원, 2년간 1880원이나 오르니 노동시장이 버티질 못했다. 가장 취약한 일자리부터 사라졌다. ‘소득주도 성장’의 민낯이 드러났다.
지난주 최저임금위원회(최임위)가 내년도 최저임금을 올해(9860원)보다 170원(1.7%) 오른 1만30원으로 결정했다. 1988년 최저임금제도가 도입된 지 37년 만에, 그리고 2017년 대선 후보들이 한목소리로 공약했던 최저임금 1만원 시대가 드디어 열렸다. 이번 인상률 1.7%는 2021년의 1.5%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낮지만 이미 최저임금 자체가 많이 올라 부담이 없을 수 없다. 10년 전인 2014년 5210원이었는데 내년엔 거의 두 배다.
한국 최저임금은 아시아 최고 수준
한국의 올해 최저임금은 일본·대만·홍콩보다 높은 아시아 최고 수준이다. 일본은 업종별·지역별로 최저임금을 따로 적용하는데 일본에서 최저임금이 가장 높은 도쿄도가 시간당 1113엔,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9510원이다. 한국의 최저임금은 지난해 중위임금의 65.8%로 주요 7개국(G7) 평균인 52.9%보다 훨씬 높다. 이러니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이 많다. 경제활동인구 부가조사 기준으로 지난해 최저임금마저 받지 못한 근로자는 301만 명으로 전체 임금 근로자의 13.7%다. 영세사업자가 많은 음식·숙박업은 최저임금 미만율(미준수율)이라고 불리는 이 비율이 37.3%나 된다. 주 15시간 이상 일할 경우 하루분을 더 지급하는 주휴수당까지 고려하면 감당 못 하겠다는 이들은 더 많을 것이다. 주휴수당을 포함하면 내년 최저임금은 시간당 1만2036원이다. 종업원 없는 ‘나 홀로’ 자영업자와 주 15시간 미만으로 일을 시키는 ‘쪼개기 알바’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최저임금은 실업급여 등 다양한 정부 정책에 연동돼 있다. 고용보험법은 최저임금의 80%를 실업급여의 하한선으로 정했다. 이번 최저임금 인상에 따라 8시간 근로 기준으로 실업급여 하루 지급액의 상·하한액 격차가 올해 2896원에서 내년 1808원으로 좁혀질 전망이다. 월 실업급여 하한액은 이미 최저임금 근로자의 세후 실수령액을 넘어섰다. 올해 실업급여 하한액은 월 189만 3120원으로 최저임금을 받는 근로자가 4대 보험료와 세금을 빼고 받는 실수령액 월 185만6276원보다 많다. 실업급여엔 4대 보험료와 세금이 붙지 않아서다. 실업급여가 최저임금보다 많으니, 퇴직과 구직을 적당히 반복하며 실업급여를 여러 번 타내는 ‘도덕적 해이’를 조장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주 내년도 최저임금을 결정한 뒤 이인재 최저임금위원회 위원장은 “현 결정 시스템은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논의가 진전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최임위 공익위원들도 대부분 제도 개편 필요성에 동의한다. 뭐가 문제일까.
최저임금 공약이 문제인 이유
최임위는 근로자위원, 사용자위원, 공익위원 9명씩 모두 27명으로 구성된다. 노사와 전문가의 수적 균형을 맞춘 것 같지만, 노사가 싸우면 공익위원이 키를 잡고 심의를 주도한다. 공익위원은 정부가 선정하기 때문에 정부가 최저임금 결정에 암묵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정권의 성격에 따라 최저임금 인상률이 크게 차이가 난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2017년 대선에서 후보들이 최저임금 1만원을 공약한 것 자체가 최저임금 결정 과정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법에서 규정한 대로 (최임위가) 독립적인 위원회로 운영되고 있다면 대통령 후보가 이를 선거공약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일이며, 최저임금 인상률이 낮게 결정되었다고 대통령이 사과할 일도 아니다. 그런데도 대통령 후보들이 대놓고 최저임금 인상률을 공약으로 내세우는 것은 본인들이 정권을 잡으면 최저임금 결정에 어떤 방식으로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고 알리는 것과 같다.”(윤희숙 『정책의 배신』)
그렇다고 경제학자 윤희숙이 정부의 개입을 문제 삼는 건 아니다. 오히려 정부가 뒤로 영향을 미치지 말고 책임 있게 정면에 나서야 한다고 주문한다. 최저임금 정책은 정부가 시장에 인위적으로 개입해 가격(임금)을 강제하면서까지 약자를 배려하는 재분배 정책인데 노사가 임금 협상하듯이 결정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현장 상황과 전문성, 정책 의지를 조화롭게 반영하기 위해서는 노사의 의견을 신중히 청취하되 결정은 정부와 전문가가 담당함으로써 정치 열기와 임금 투쟁으로부터 최저임금 결정 과정을 분리하는 개혁이 절실하다.”(위의 책)
“최임위 숫자 너무 많아 얼굴도 안 보여”
최임위 공익위원인 이정민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도 공저 『혁신의 시작』에서 “최임위에서 논의하되 결정은 정부가 하는 식으로 바꿔야 할 것”이라고 썼다. 올해 최임위를 직접 경험한 이 교수는 생각이 달라졌을까. “최임위 숫자부터 줄여야 한다. 지금은 노·사·공 27명으로 너무 많아 집중적인 논의가 어렵다. 발언자 얼굴도 잘 안 보일 지경이다.”
올해 최임위는 업종별 차등적용을 표결 끝에 부결했다. 이 교수는 “지금 결정구조로는 업종별 차등적용이 어렵다”고 했다. 업종별 차등적용을 위해선 해당 업종의 임금 통계를 비롯해 최저임금 영향을 받는 근로자 숫자 등의 데이터가 꼭 필요한데 그런 자료가 없다. 판단은 매우 기술적인 과정인데 전문적인 논의를 할 수 있는 장도 마련돼 있지 않다.
이 교수는 “지금은 최저임금 수준을 조정할 여지가 많지 않기 때문에 적정선에서 줄타기를 잘해야 한다”고 했다. 디테일이 중요하고 통계를 많이 봐야 하는 만큼 전문가 참여 확대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업종별 차등적용과 관련해 지난달 국회입법조사처는 ‘최저임금 업종별 차등적용의 쟁점과 과제’ 보고서에서 일반적인 최저임금보다 더 높은 업종별 최저임금을 허용하는 상향식 최저임금의 해외사례를 소개하며 “현행 법 규정 및 제도 취지를 고려할 때 ‘더 낮은’ 최저임금 차등적용은 한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노동생산성이나 지급능력 등을 이유로 최저임금을 낮추는 차등적용은 제도의 취지에 반한다는 것이다. 최임위 사용자 위원인 류기정 한국경영자총협회 전무는 “외국과 우리는 역사적 배경이 다르다”며 “외국은 단일 최저임금을 낮게 유지하면서 생산성이 높은 일부 업종의 최저임금을 올렸지만 우리는 보수 정부에서도 꾸준히 최저임금을 인상해 최저임금 수준이 이미 중위소득의 40~60% 선을 넘어섰다”고 반박했다.
최저임금만이 분배 대책은 아니다
최저임금이 빈곤 완화와 분배 개선을 위한 유일한 해결책도 아니다. 최저임금 근로자 중 빈곤층에 속하는 비율이 30%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윤희숙 『정책의 배신』).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 높아지고 단시간 선택 근로가 많아지면서 가구의 소득원이 늘었다. 최저임금 인상은 협상력이 없는 취약 근로자의 일자리를 날리면서 오히려 중산층 소득을 올리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정말 도움이 필요한 빈곤층은 근로소득자가 아무도 없는 가정이다. 최저임금 인상은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다. 반면, 근로장려세제(EITC)는 저임금 근로자 중 빈곤층에 보조금을 주는 방식이어서 최저임금보다 빈곤층 지원에 효과적이다.
최저임금 결정방식을 바꾸려면 노사가 사실상 전국 단위 임금 협상을 해오던 37년간의 익숙했던 과거와 결별해야 한다. 그것을 권력이라 생각하면 놓기 힘들 수 있다. 최저임금법 1조는 ‘근로자의 생활 안정과 노동력의 질적 향상을 꾀함으로써 국민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 법의 목적이라고 했다. 최임위 공익위원 오은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30여년간 쌓인 최저임금 결정 과정의 문제를 직시하고 충분한 숙의를 거쳐 이제는 개선책을 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공익위원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정부의 역할을 강화하는 근본적인 대책을 제안했다. 권 교수는 “중장기적으로 현재의 최임위를 최저임금과 공공부문 임금, 공무원 임금 등 임금 관련 각 기능을 통합해 국가임금위원회로 전환하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기능별로 담당 위원회를 구성해 이해관계자나 국회가 추천하는 전문가로 구성된 상시기구로 운영하는 방안이다. 최임위 상설화와 전문가 참여 확대는 다른 공익위원과 학계에서도 공감대가 많다. 지금 바꾸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서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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