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효식의 시선] 드라마 ‘돌풍’이 보여준 법치의 종말
넷플릭스 정치 드라마 ‘돌풍’은 두 얼굴의 드라마다. 매회 나선형으로 증폭되는 갈등 구조는 흥분과 긴장에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씁쓸한 뒷맛과 불편함도 안겨준다. 두 주인공 특수부 검사 출신 정치인 박동호(설경구)와 전대협 출신 정수진(김희애)의 대결 구도에 주된 비판을 받는 이른바 86그룹만 그 대상이 아니다. 1980년대 민주화 이후 40년 한국 정치를 지켜본 국민 모두가 언제가 본 듯한 역사의 장면들로 강제 기억 소환을 당한다. 돌풍이 전두환·김대중·노무현·박근혜·문재인 전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재임 기간 벌어졌던 일들이 토막토막 해체됐다가 더 새롭고 극적인 가상 역사로 재구성됐기 때문이다. ‘돌풍’을 보수·진보 진영 드라마로 보는 건 분명 착시겠지만, 전·현직 대통령에게 애착을 가진 지지자라면 거북한 장면이 많을 수밖에 없다. 특히 유산 계승 정치가 여전히 강하게 작동하면서 공과에 대한 객관적인 역사적 평가가 불가능한 한국 정치 풍토에선 더욱 그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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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한 권력투쟁이 법치를 도구화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대한 경고
최후 보루 사법부가 중심 잡아야
」
내 경우 ‘돌풍’의 씁쓸한 뒤끝은 어느 대통령을 연상시키는 특정 사건이 아니라 권력투쟁의 도구가 된 법치의 타락을 막장까지 보여준 데서 나왔다. 이는 박경수 작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2024년 대한민국 정치 현실과 직간접적으로 묘하게 오버랩됐다.(※이하 스포일러 주의)
현직 대통령은 자신의 아들과 대기업 간 유착 비리를 캐는 여당 의원에게 뇌물 비리를 씌워 구속 직전까지 몰아가 결국 자살하게 만든다. 이어 그의 친구인 국무총리마저 구속하려 한다. 반발한 총리는 대통령을 시해한 뒤 권한대행이 되어 특수부 검사 출신 친구를 서울중앙지검장에 임명, 한 달 안에 친구의 복수는 물론 부패 정치인 일소까지 함으로써 대한민국을 리셋하겠다고 나선다.
양측은 공수를 교대하며 검찰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를 무기로 활용하는 건 기본. 특검법과 거부권, 현직 대통령 체포영장 발부 시도까지 벌여 박 작가의 상상력에 놀라게 된다. 대통령 탄핵소추와 헌법재판소 재판관 협박·매수, 청와대 진격투쟁까지 나아가면 가상 대한민국의 헌정 질서는 그라운드 제로 수준으로 파괴된다.
이 정도면 법치의 종말이다. 단순히 법치만 죽는 것이 아니라 법치에 기반한 민주공화국도 종말을 맞는 게 자연스러울 정도다. 드라마는 법치 파괴 당사자와 비리 정치인이 일소한 나라가 새 출발 할 것이란 희망을 보여준다. 하지만 한번 무너진 민주주의와 법치가 회복하는 데 오랜 세월이 걸린다는 걸 우린 안다. 프랑스 정치철학자 몽테스키외는 물론 미국 헌법 초안자들이 전제정(독재)의 탄생을 막기 위해 촘촘히 법제도를 설계하는 데 공을 들인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래서 드라마 ‘돌풍’은 매회 불편하지만 대한민국이 맞을지도 모를 암울한 디스토피아적 미래의 경고이기도 했다.
실제 ‘돌풍’이 그린 가상 현실과 비교해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처한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다. 8월 22일 170석 더불어민주당 대표 연임이 확정적인 이재명 전 대표는 대장동과 대북송금 등 7개 사건 11개 혐의로 4개 재판을 받고 있고, 빠르면 10월 중 1개 이상 재판에서 1심 선고가 나올 수 있다. 그런 이 전 대표가 이번 주말 19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 청원 청문회를 열고 대통령 탄핵에 시동을 건다. 더 나아가 민주당은 아예 검찰청을 해체하고 대신 공소청을 만드는 법안도 추진한다. 이 모두 이 전 대표 자신을 사법리스크에서 보호하고 검찰에 보복·복수하겠다는 심산이 아니면 무엇인가.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 친윤계 의원들은 더 한심하게 내부 권력투쟁에 여념이 없다. 전당대회에서 김건희 여사의 사적 텔레그램 문자메시지를 공개하고 댓글팀을 수사하라며 자중지란을 벌이고 있다. 오로지 김 여사를 지키기 위해 한동훈 후보의 당 대표 당선을 막겠다는 비민주적 당내 선거 개입에 여당 지지층마저 등을 돌린다.
여당은 오로지 윤석열 정부 하반기 국정의 성패를 21대 대선(2027년 3월 3일) 이전에 이재명 전 대표의 유죄 확정이나 법정구속에 기대를 거는 모습이다. 반대로 야당은 그 전에 윤 대통령을 대통령직에서 먼저 끌어내리겠다는 노골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정치 실종은커녕 진영 간 내전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돌풍’이 보여준 법치 파괴 정도가 10이라면 ▶국정조사 요구안 2건(언론장악·채상병 수사방해) ▶검사 탄핵안 4건 ▶대통령 탄핵청원 청문회 1건이 추진 중인 현실은 7까진 온 것 같다. 드라마와 달리 행정부와 입법부 주도로 법치 파괴가 더 나아가지 못하도록 사법부라도 중심을 잡기를 염원하는 이유다.
정효식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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