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자유에 울타리가 자꾸만 생겨나는 이유
“저렇게 쓰라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정말 부끄럽네요.”
일본 도쿄도지사 선거 와중에 강아지 사진으로 도배된 거리 게시판이 있다고 해 찾아갔더니, 근처에 서 있던 나이 지긋한 신사가 기자에게 보인 반응이다.
선거는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후보들 간 정책 공방보다는 선거 포스터가 더 화제가 됐다. 엉뚱한 사진들이 거리의 선거 게시판을 도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일차적 책임은 ‘NHK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당’이란 정치단체다. NHK당은 24명의 후보를 내면서 48명의 후보자 포스터를 붙일 수 있는 게시판 절반을 선점했다. 그리곤 기부금을 내면 원하는 내용으로 포스터를 붙여주겠다고 선전했다. 그 결과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명칭)는 일본 영토’라는 포스터가 도쿄의 코리아타운이라는 신오쿠보(新大久保) 거리에 버젓이 내걸렸다. 번화가엔 풍속업소 광고물이 등장하기도 했다. 강아지 사진이나 어린아이의 그림은 얌전하다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법이다. 일본 공직선거법 143~145조는 선거 포스터 크기까지 세세하고 규정하지만, 막상 그 내용을 제한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 공직선거법도 벽보 내용을 제한하진 않지만 내용은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하도록 해 사실상 사전심의가 이뤄지고 있다. 반면 일본은 포스터를 내걸기 전엔 어떤 내용인지 선관위도 알 수 없다고 한다. 일본 언론들은 이런 법의 구멍이 기부금 모금을 미끼로 선거 게시판을 판매하는 ‘선거 비즈니스’가 횡행하는 배경이라 지적한다.
후보 정견발표에서도 낯뜨거운 장면이 속출했다. 이 역시 방송국은 후보자가 녹화한 방송을 그대로 또 무료로 내보내야 한다는 공직선거법 제150조 때문이다. ‘선량한 풍속을 해쳐선 안 된다’라는 조항이 있긴 하지만, 이 조항이 방송 송출을 중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일본의 선거 시스템은 후보자의 자유로운 의견 표출을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도쿄도지사 선거 후 일본 정치권은 이런 문제를 방치할 수 없다며 공직선거법 개정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야당과 대다수 일본 언론은 자칫 표현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며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선거를 우습게 여긴 소수의 행태로 인하여 일정한 제약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최근 일본에선 쓰레기로 더럽혀지는 후지산의 입산 유료화 결정, 음주 소란으로 노상음주를 금지한 도쿄 시부야(渋谷)구의 조례 개정 등이 논란을 빚고 있다. 소수의 몰지각으로 인한 다수의 피해라는 점에서 본질이 다르지 않아 보인다.
정원석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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