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여름에는 연꽃이 핀다네
여름이면 연못에 연꽃이 핀다. 이즈음이면 연꽃을 핑계로 모이는 이들이 있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무려 삼십 년을 이어오는 차 모임이다.
까마득한 날, 해남 백호리 백련지(白蓮池)에 하얀 연꽃이 가득 피어있는 광경을 보고는 지인들에게 소문을 내었다. 강원도 화전민 집에 은거하던 법정스님도 불원천리하고 그해 두 번씩이나 찾아오셨다. 백련지의 내력을 마을 사람들에게 수소문하다가 그곳에 연을 심은 할머니를 만났다. “저가 강진의 금당리에서 열일곱에 시집올 띠, 연꽃 뿌리를 다섯 개 뽑아와서 집 앞 저수지에 심었어라! 벌써 육십 년이어라. 2년 전엔가 꽃이 저수지에 너무 많이 퍼진다고 굴착기로 파 뒤집었는디 그때부터 더 퍼졌지라.” 그 덕분에 하얀 연꽃 가득한 수천 평의 연못이 되었단다. 그 길로 강진의 금당리의 백련당이라는 현판이 걸린 정자와 연못을 찾아갔다. 이야기의 진원지답게 마을 앞 조그마한 연못에 오래된 정자를 둘러싸고 백련이 가득 피었는데,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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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성 들여서 연못 만들었으나
기대했던 연꽃은 감감무소식
인연 합당해야 결과가 있는 법
」
다음 해, 차를 마시며 마음을 나누는 벗들에게 백련지 방문을 권하니, 흔쾌히 차와 다구를 챙겨 모여들었다. 정자를 관리하는 이의 허락을 받아 찻자리를 가졌다. 모임 이름도 마을 이름을 따 ‘금당다회’라 정했다. 그때부터 매화 피는 봄이면 시인이 사는 악양 동매골에서, 여름에는 연꽃 피는 산천에서, 가을이면 국화 만발한 마을에서, 겨울이면 하얀 눈 소복한 인연처에서 차회를 열었다. 세월이 흘러 다섯 개의 연뿌리가 저수지 가득한 백련밭이 되듯이 삼십 년을 함께 탁마해온 다우(茶友)들도 세상 곳곳에서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은은한 향기와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살아가고 있다.
모름지기 어떤 모임이 웅숭깊어지려면 승가처럼 세 개의 보배가 있어야 한다. 첫 번째는 서로를 부처님처럼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두 번째는 인격 완성을 위해 진리를 탐구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세 번째는 개개인의 몸가짐이 청정하고, 서로가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수덕사의 고승 만공스님은 조국 해방 소식을 듣고는 붓 대신 무궁화 가지를 꺾어 ‘世界一花’(세계일화)라고 썼다. 그리고는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산천초목이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다. 남편과 아내가 한 송이 꽃이요, 부모와 자식도 한 송이 꽃.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라는 이 생각 한 가지를 바로 지니게 되면 세상은 편할 것이다. 세계일화의 참뜻을 펴려면, 지렁이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참새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심지어 저 미웠던 원수들마저도 부처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른 교를 믿는 사람들도 부처로 보아야 할 것이니, 그리하면 세상 모두가 편안할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참선마을을 품은 안성 비봉산의 흙은 마사토로 이루어져 있다. 마사토 표피층 아래는 암석층이어서 나무들이 깊게 뿌리 내리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뿌리를 드러낸 채 힘없이 넘어진 나무들이 즐비하다. 장마 기간이라 산사태가 올까, 걱정돼 수시로 산을 오르내린다. 바위 아래 틈새로 맑은 샘물이 퐁퐁퐁 끊임없이 솟는다. 옳다 싶어 물이 모이는 곳에 조그맣게 연못을 만들었다. 주변 개울에서 창포도 옮겨다 심고, 소시지처럼 생긴 부들도 가져다 심었다. 여름날 필 아름답고 푸르스름한 연꽃을 떠올리면서 연꽃을 연구하는 지인에게서 얻은 하얀 연꽃 뿌리와 발아시킨 연꽃씨를 정성껏 심었다. 그러나 어린잎이 물 위로 올라오지를 않는다. 용인 호암미술관 희원에 핀 노란 어리연 몇 뿌리도 얻어 심었으나 여태 감감무소식이다.
“연못을 만들고, 연뿌리를 심었으니 7월 연꽃 필 때쯤 안성 참선마을에서 만납시다.” 지난봄 호기롭게 다우들을 초대하였으나 모임 날짜가 코앞인데 꽃은커녕 이파리도 나오지 않았다. 물이 차갑고 마사토 토양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인연이 합당해야 결과가 있는 법이다. 사람들 모임도 다르지 않다. 서로가 진흙의 양분이 되어야 하고, 따뜻한 격려와 존중의 바람이 불어야 한다.
오래된 연못은 긴 세월 동안 연꽃 피울 조건을 다 갖춰온 연못이다. 수많은 못 가운데 똑같은 연못이 없듯이 똑같은 연꽃도 존재하지 않는다. 연못마다 오직 그 연못에서만 볼 수 있는 연꽃을 피우듯, 사람들의 모임도 그러하다.
차담정담(茶談情談)에 시간 가는 줄 모를 만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참선마을 연못 대신 다우들의 얼굴에서 각각의 멋과 개성을 담은, 어쩌면 더 값진 연꽃들을 감상할 수 있었다.
‘어디서건 여름엔 연꽃이 피는 법이라네!’
금강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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