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 모래주머니 차고 뛰는 신세...유통기한 지난 규제 업데이트해야”
류진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 회장이 “제도 경쟁력이 곧 국가경쟁력인 시대에 우리 기업들은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뛰는 형국”이라며 “유통기한이 지난 제도는 하루빨리 업데이트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류 회장은 지난 12일 제주특별자치 서귀포시에서 가진 ‘2024 한경협 최고경영자(CEO) 제주하계포럼’ 기자간담회에서 “한국 경제의 위기를 말할 때 흔히 3고(高) 리스크(고금리·고물가·고환율)를 지목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세 가지 문제 ‘O·L·D’ 가 있다”라며 “O(Outdated, 낡은), L(Low, 낮은), D(Dormant, 정체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라고 말했다. 시대에 맞지 않는 낡은 제도, 낮은 출산율과 노동생산성, 정체된 산업 구조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류 회장은 “세계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하는데, 가뿐하게 뛰는 경쟁국을 상대해야 하는 한국 기업들은 너무 힘들다”라며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지 않는 것부터 과감하게 폐지해야 하며, 꼭 필요한 규제라도 기업의 경쟁력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유연하고 스마트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국회에서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 외에 주주까지 확대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안이 발의된 데 대해 류 회장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초래하지 않도록 유념해야 한다”라며 “제도를 만들 때 현상에 집착하다 본질을 놓치면 안 된다”고 짚었다.
한국의 산업 구조가 정체된 상황에 대해서도 우려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20년새 한국의 10대 수출 리스트에서 컴퓨터·의류·영상기기가 빠지고 자동차부품·평판디스플레이센서·정밀화학원료가 추가된 데 그쳤다. 류 회장은 “인류를 송두리째 바꾸는 AI 시대에 우리 기업과 산업이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할지 깊이 있는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저출생이 장기화하며 커지는 인구 부족 우려와 관련해선 노동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한경협, 4대 그룹 관계 회복은
지난해 8월 취임한 류 회장은 내달 취임 1주년을 앞둔 소회에 대해서 “본업에서 이렇게 일을 했더라면 돈을 더 많이 벌었겠다 싶을 만큼 열심히 일했다”라며 “(한경협의 위상을) 제자리에 갖다 놓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경협 전신인 전국경제인연합회 시절 논란이 된 정경유착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한경협은 지난해 10월 윤리위원회를 발족했다. 윤리위에 참여 중인 김창범 한경협 상근부회장은 “목영준 헌법재판관이 위원장을 맡아서 독립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라며 “대외 협찬과 관련한 3억원 이상 되는 비용은 윤리위 심의를 거치고, 그 외에도 필요시 위원들이 논의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류 회장은 취임 후 한경협의 회비 체계를 직접 10단계로 개편했으며, 지난 3월 한경협은 4대 그룹을 비롯한 회원사에 회비 납부를 요청했다. 하지만 4대 그룹은 현재까지 회비를 납부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류 회장은 “삼성의 (회비 납부) 이슈에 대해서는 기다리면 좋은 소식이 오지 않을까 한다”라며 “간접적으로 대화도 하고 있고, 시간이 걸리겠지만 해결될 것”이라고 답했다.
11월에 있을 미국 대선 이후 한국의 영향에 대해서 류 회장은 “도널드 트럼프 당선시 (한국에) 어려워지는 상황도 있겠지만 편한 면도 있을 것”이라며 ”우리하고만 (미국이) 딜(협상)을 하려면 어려울 수 있으니, 일본과 함께해 한·미·일 세 나라가 합친다면 트럼프도 협조적일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미국 민주당이 오히려 자국 기업을 보호하는 경향이 있고, 공화당은 미국에 투자한 기업을 미국 기업과 똑같이 대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트럼프 후보가 더 나을 수도 있다”라며 “한국 기업들은 (민주당 우호 세력인) 노조가 없는 주에 주로 투자했던 만큼 트럼프 후보와 더 맞을 수 있다”고 말했다. 풍산그룹 회장인 류 회장은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등 미국 내 두터운 인적 네트워크를 두루 갖춘 ‘미국통’으로 불린다. 하반기 경제전망에 대해 류 회장은 “반도체가 잘 나가고, 삼성도 (좋아지고 있기에) 큰 걱정은 없을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서귀포=박해리 기자 park.hae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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