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빈곤에 42% '국선' 받는데…변호사비 연체하는 법원
광주광역시에서 일하는 변호사 A씨는 지난달 말 동료 변호사에게 “너 국선 변호비 들어왔어?”라고 물었다. 월말이면 ‘국고입금’으로 통장에 뜨던 국선 변호비가 두 달 가량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A씨는 “2주쯤 늦어지나 했는데 6월 말까지도 안 들어와서 주변에 물어보니 비슷한 사람이 여럿 있더라”고 했다. 부산과 대구에서 일하는 다른 변호사들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증언했다. 부산에서 일하는 변호사 B씨는 “3월에 끝난 사건인데 6월에야 보수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대구에서 일하는 변호사 C씨도 “석 달 가까이 입금이 늦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국선 사건 40% 돌파… 고령화·경제난에↑
국선 변호인의 수임료를 제때 주지 못하는 일이 전국 법원에서 벌어지고 있다. 연말 예산 소진으로 지급이 다소 늦어지는 경우는 있었지만, 연초부터 지급에 어려움을 겪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올해 5월까지 국선변호료 예산은 54%가 집행됐다. 하반기 사건 선고가 더 많은 점을 감안하면 예산 부족이 예상된다는게 법원 설명이다. 한 지방법원에서는 지난해 9월부터 밀린 보수를 올해 초에야 지급하기도 했다.
법원행정처는 각 법원의 수요를 조사해 기획재정부에서 국선변호인 예산을 받아온다. 이후 이를 각 법원에 5회에 나눠 분배한다. 일선 법원의 한 관계자는 “법원행정처에 청구를 한 뒤 예산이 내려오기까지 시간도 더 걸렸고, 액수도 필요한 금액보다 적었다”고 말했다. 예산 부족으로 3월에 끝난 재판의 국선변호인 보수를 6월에도 지급하지 못한 경우가 속출했다는 것이다.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일선 법원 신청액은 늘었는데 예산은 지난해 수준으로 지급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는 구조적으로 국선변호 비중이 커지면서 생긴 일이라는 게 법원 내부의 분석이다. 특히 지난해 국선변호를 받은 피고인 수는 13만6792명으로 2022년(12만2541명) 대비 1만4251명 늘었다. 같은 시기 형사피고인 숫자는 31만502명에서 32만5760명으로 1만5258명 늘었다. 증가한 형사피고인 대다수(93.4%)가 국선변호인 제도에 의지했다는 의미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구속·기소·재판이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도 국선변호 수요는 감소하지 않았다. 2020년 35만 명이던 형사 피고인은 2022년 31만 명까지 줄었지만, 국선변호를 받는 피고인 수는 2020~2022년 꾸준히 12만명 선을 유지했다.
국선변호 수요가 늘어난 데는 다양한 요인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①경제난으로 국선을 선임할 수밖에 없는 피고인 ②변호인없이는 재판을 못받는 70세 이상 고령 피고인이 늘어난 점 등이 영향을 미쳤다는 게 법원 내부의 분석이다. 이에 더해 2021년 군사법원법 개정 이후 민간법원에서 재판을 받는 군(軍) 피고인이 늘고,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5월 “이미 구속된 사람이 별건으로 기소될 경우, 따로 국선변호인을 선정해줘야 한다”는 판단을 하면서 국선변호인 수요는 앞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이 커졌다.
수요증가 못따라잡는 국선변호료 예산
그러나 예산은 수요 증가를 따라 잡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국선변호 피고인은 2022년 대비 11.6%(12만2541명→13만6792명) 늘었지만, 예산은 7%(610억원→653억원) 증가하는데 그쳤다. 법원행정처는 내년 국선변호인 예산을 대폭 늘려 982억원을 신청할 예정이지만, 정부가 이를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국선 전담변호사에게 지급되는 고정비 성격의 월급을 뺀 국선 일반변호료 예산은 미스매치가 더 심하다. 2021년 7만5553명이던 국선 일반변호인 사건은 2022년(7만8986건)을 거쳐 지난해 9만1510건까지 급증했다. 하지만 2021년 403억원이었던 국산 일반변호료 예산은 2022년 386억원으로 감소했다. 이후 2023년 427억원, 2024년 471억원 등으로 증액했지만, 현장 수요는 따라잡지 못한다는 게 법원행정처 설명이다.
문제는 국선 변호료 지급 연체가 고령‧장애 등 취약 피고인의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국선변호사 제도는 ‘누구든 체포‧구속을 당했을 때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최후 안전망이다. 수도권 한 변호사는 “누구든 변호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국선변호인을 하긴 했는데, 나라에서 예산 부족을 이유로 보수 지급이 자꾸 늦어지면 나중에는 국선을 맡기가 좀 꺼려질 것 같다”고 말했다. 한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옛날엔 국선 변호인이 인기가 많아서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몰렸는데, 요즘은 사실상 열정페이를 시키는 것이다 보니 개인적 사명감 외에는 별로 매력적인 일이 아니게 됐다”고 말했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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