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기, 나만의 길을 찾는 시간 [공백기 인터뷰]
삶의 어느 지점, 우리는 모두 공백기를 지난다. 학교에 다니지 못하거나, 일하지 못하는 상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만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1개월 이상의 공백기는 용납되지 않는다. 공백을 경제 손실, 게으름과 무능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이런 인식 속에서 공백기를 보내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불행하다. 그냥 쉬는 사람은 없다.
사단법인 니트생활자는 공백기를 보내는 청년들의 사회적 관계망을 만드는 커뮤니티 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 2019년부터 공백기를 보내는 20~30대 청년들을 1,000명 이상 만나오며 공백기의 문제는 개인이 아닌 사회가 먼저 바뀌어야 해결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각기 다른 이유로 공백기를 보내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통해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떤 변화를 만들어 가야 할지 고민해 봤으면 좋겠다.
이번 기고는 현재 공백기를 보내고 있는 3명의 청년(닉네임 베리, 지닛, 예서)의 이야기를 담았다.
공백기를 갖게 된 상황을 소개해 주세요.
예서-여러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던 시점에 종양을 수술하면서 지금까지 1년 이상 공백기를 갖고 있어요. 회복을 위해 잠시 본가에 내려가서 가족들과 함께 지내며 강아지와 고양이도 키우고 있어요. 밥도 해 먹고 농작물도 키우고 집안일도 돕다가 지금은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지내고 있어요.
지닛-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어요. 그러다 건강이 안 좋아져서 수술받았고, 일을 그만두고 2년 정도 쉬었습니다. 가족들과 관계가 좋지 않아서 혼자 나와서 살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마음이 많이 편해졌어요. 혼자 있으면서 사회성도 사라지고, 말하는 방법도 잊고요. 그래서 사람을 만날 기회를 찾았어요. 니트생활자 커뮤니티를 알게 돼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어요.
베리-저도 아르바이트를 여러 개 하다가 1년에 7번 퇴사한 경험이 있어요. 코로나19 시기에는 한 직장에 3년 정도 다녔고요. 그러다 집에 일이 생겨서 다 정리하고 본가로 들어갔어요. 매일 누워있다가 죄책감이 들어서 최근에는 사이버대학교를 다니고 있어요.
세 분 다 ‘일을 탐색하는 중’이라고 이야기해 주셨어요.
베리-저는 더 이상 회사에 소속되고 싶은 생각은 없기 때문에 제가 꾸려 나갈 수 있는 일을 고민하고 있어요. 니트생활자 커뮤니티 활동에서 느꼈던 건 ‘더불어 사는 삶’이었어요. 엄마를 보면서 ‘일하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외로움을 느끼게 됐어요. 그래서 중년 여성을 대상으로 일할 기회를 주는 회사를 만들면 어떨지 생각 중이에요.
예서-저는 비영리 기관에서 어린이 작업실을 만드는 일을 3년 정도 했어요. 다양한 그룹 사이에서 의사소통하고 이견을 조율하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일을 할수록 전문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이직한 곳에서 은퇴한 분들을 대상으로 면접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 대단한 커리어를 가지신 분들도 은퇴 후 많이 위축되어 계시더라고요. 반면에 기술직인 아버지는 은퇴할 나이가 될수록 오히려 많은 노하우를 축적하고 대우받는 모습을 보면서 제 삶을 길게 보고 차근히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저의 전공을 살려 전문 자격증을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닛-먹고 살 걱정, 살아내는 게 가장 힘들어요. 삶을 살면서 돈을 벌어들이는 건 필수로 해야 하기에 어떤 일을 하고 살지 고민돼요. 회사의 수직 체계, 사람 문제 등 크고 작은 일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서 혼자서 일을 하고 싶더라고요. 최대한 많은 형태의 일을 접하고 경험해 보면서 나에게 잘 맞는 일을 찾아가 보고 싶어요.
공백 기간 중 가장 어려웠던 건 무엇이었을까요.
예서-같이 이야기하고 공감할 친구가 없는 게 힘들더라고요. 지금은 저와 비슷하게 공백기를 가진 친구가 생겨서 종종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또 같은 고민을 나누기도 해요. 전에는 일상이나 환경이 달라지니 친구들을 만나면서도 고립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리고 아무래도 안정적인 수입이 없는 게 가장 어렵죠.
지닛-저도 연락을 하는 사람이 없다 보니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 입장을 이해해주고 편하게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해요. 혼자 살 게 되니까 우울한 생각을 습관적으로 하더라고요. 그걸 좀 끊고 싶기도 해요.
베리-아무래도 사회적 고립이 가장 힘들어요. 공백기를 향한 사회 시선도 너무 차갑고요. 나는 당장 시작하고 싶거나,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 시간만 흘러가는 게 불안하고요. 또 공백 기간이 길어지면 죄책감이나 무기력함도 커지는데 혼자서 이겨내기 힘들어요.
공백기에 일상의 루틴을 찾고 관계를 맺는 커뮤니티에 참여했어요. 어땠나요.
지닛-저는 정말 만족 중인데요. 루틴 형성을 위해 운동을 시작했는데 커뮤니티 운영진의 관리를 받으면서 억지로라도 나가니까 활력이 생기더라고요. 또 커뮤니티 참여자들이 응원해 주니까 그만두지 않고 지속하게 되고요. 최근 아르바이트를 지원했는데, 제가 한 일인데도 믿기질 않아요. ‘이렇게 활력이 생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신기하고요.
예서-요리를 직접 해 먹고 포스팅하는 걸 매일 하고 있어요. 매일 다른 레시피에 도전하는 스스로가 참 새롭고 놀라워요. 밥을 직접 해 먹는 업무를 하다 보니 바른 식습관도 생겼고요. 또 많은 설명을 하지 않아도 공감할 수 있는 커뮤니티가 있으니, 서로에게 응원을 해줄 수 있어서 좋아요.
베리-영어 필사, 한국어 필사, 운동을 하고 있어요. 영어 필사가 의외로 도움이 많이 돼요. 사연들이 자극적이에요. 그래서 재밌어요. 일주일에 사흘은 헬스장에 나가서 운동도 해요. 인터벌 러닝을 해서 시간도 생각보다 많이 안 걸리고 무조건 씻게 되니 좋아요.
나에게 공백 기간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지닛-소용돌이 속에 살 땐 몰랐는데 공백기가 생기고 삶이 잔잔해지니 우울이나 불안, 강박 같은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어요. 그게 절 괴롭히고 있다는 걸 인지하기 시작했죠. 공백기는 저를 치유하고, 나아갈 방향을 점검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그 시간을 함께할 누군가가 있다는 게 정말 큰 힘이 돼요. 아무도 없었다면 무기력과 우울함에 고립되어 제자리걸음은 물론 퇴행했을 거 같아요. 다시 사회에 나올 수 있게 지지대 역할과 연결고리 도움을 준 커뮤니티에 고마워요.
예서-예전에는 공백기를 빨리 벗어나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누구나 살면서 다양한 이유로 공백기가 생길 수 있잖아요. 또 단순히 일을 한다, 안 한다 딱 두 가지로 구분하기에는 세상에는 다양한 삶과 사람이 존재하고요. 공백기를 다른 시선으로 볼 필요가 있어요. 이런 시선이 나와 우리의 삶, 우리의 사회를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어요.
니트생활자 admin@neetpeopl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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