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회 중앙학생시조백일장] 부산·여수에서 새벽기차 타고 시조백일장으로…180명 모인 시조 축제
"오늘날 세계를 휩쓸고 있는 K-열풍의 중심에는 한글이 있습니다. 시조를 사랑하는 학생들이 문화의 기둥이고 미래입니다."
낮 기온이 33.3도까지 치솟은 지난 13일, 정용국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은 전국에서 올라온 초·중·고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개회사를 겸한 기조강연에서다. 정 이사장은 "우리 문화가 융성할 수 있었던 건 한글과 시조를 사랑하는 여러분과 같은 미래 세대 덕분"이라며 참가자들을 격려했다. 이날 서울 종로구 조계사 전통문화예술공연장에서 열린 제10회 중앙학생시조백일장, 제7회 중앙학생시조암송경연대회 현장 풍경이다.
이날 전국에서 모두 180명의 학생이 참여했다. 부산·여수 등지에서 KTX 새벽 열차를 타고 올라온 학생도 있었다. 좌석이 부족해 학부모 대부분은 개회식이 열리는 동안 행사장 뒤편에 서서 지켜봐야 했다.
올해 백일장과 암송대회에는 전국의 140개 초·중·고에서 614명이 응모했다. 지난해에 비해 참가 학교와 참가자 수가 모두 늘었다. 본심에는 301명이 진출했고, 그 중 180명이 이날 백일장에 참가했다.
오전 11시 백일장이 시작됐다. 시조시인협회 김영주 사무총장이 백일장 시제(試題)를 발표했다. 초등부는 ‘노을’과 ‘주머니’, 중등부는 ‘뿌리’와 ‘소나기’, 고등부는 ‘벽’과 ‘밤(night)’이었다. 경연이 시작되자 왁자지껄했던 현장에 순식간에 긴장감이 돌았다. 참가자들은 연습장에 고개를 파묻고 연필로 시어를 쓰고 지우며 시조 창작에 몰두했다. 제한 시간인 두 시간을 꽉 채운 학생도 10명 남짓 있었다.
이어진 시조암송대회는 시조시인협회가 선정해 사전에 공개한 시조 50편 가운데 무작위로 두 편씩을 외우는 예심, 1대1 토너먼트 형식의 본심으로 나눠 진행됐다. 토너먼트에서 맞붙은 진주 주약초 2학년 김지명양과, 같은 학교 4학년 선배 서유현양의 결승이 이날의 하이라이트였다. 두 학생 모두 시조 다섯 편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암송해 큰 박수를 받았다. 오랜 심사 끝에 "발음이 또렷하고 시조 율격을 잘 살렸다"는 평과 함께 서유현양이 판정승으로 대상을 받았다. 김지명양은 지난해 장려상에 이어 올해는 2등상인 최우수상을 받았다.
오후 4시, 교육부장관상인 대상 시상에 나선 교육부 소은주 책임교육정책관은 "자신의 생각을 정형시인 시조에 녹여내는 창조 과정에서 많은 성장이 있을 것"이라며 "옛것에 새것을 조합하는 융합적 사고력을 키우는 데 시조가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정제원 문화스포츠디렉터는 "중앙일보는 매주 지면에 시조를 소개하고, 매년 학생시조백일장과 중앙시조대상을 열어 시조를 널리 알리는데 힘쓰고 있다"며 "시조를 짓는 학생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더 좋은 사회가 될 것"이라고 했다.
초등부 대상 박세명(여수좌수영초5)
주머니
캥거루 주머니는 아기를 담아줘요
아기가 못 뛰어서 엄마가 데려가죠
우리도 캥거루처럼 엄마 품에 쏘오옥
따뜻한 주머니 속 온기는 알려줘요
엄마가 우리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엄마가 날 위한 희생 얼마만큼 하는지
엄마는 우리에게 사랑을 주었지요
다음에 크고나면 사랑을 나눌거죠
비 갠 뒤 무지개처럼 선물같은 사랑을
나에게 사랑이란 주머니 같았지요
날 위해 품어주는 안전한 은신처죠
모두가 주머니속에 안겼으면 좋겠죠
전남 여수좌수영초등학교 5학년 박세명(11)양은 대상 수상에 “아직도 못 믿겠다. 선생님과 2주 정도 준비하면서 좋은 가르침을 많이 받았는데, 함께 상을 받아 가장 기쁘다”고 말했다. 박양을 가르친 선생님은 우수지도자상을 수상했다. 박 양은 “선생님 덕분에 시조의 매력을 알았다. 우리 조상들의 얼이 담긴 옛날 시를 우리 이야기로 바꿔 쓴다는 생각에 재미있었다”고 덧붙였다.
박 양은 초등부 시제(試題) ‘노을’과 ‘주머니’를 듣고 “한 번도 연습하지 못한 단어라 조금 놀랐다”고 털어놨다. 이내 마인드맵으로 주머니에서 캥거루를 연상했단다. 그는 “아빠와 함께 봤던 동물 다큐멘터리가 떠올랐다. 캥거루로 정한 후엔 침착하게 마음을 다잡고 쓰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장래희망은 외교관이다. 박 양은 “시조는 앞으로의 언어 공부에 큰 바탕이 될 것 같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글자 수에 맞춰서 적는 시조 훈련을 계속 하면, 외교관이 돼서도 조리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등부 대상 서준혁(채러티크리스천중2)
뿌리
대한의 뿌리는 위대한 고대제국
만주를 호령했던 고구려 기마부대
이러한 정신받아서 전세계로 나가리
대한의 뿌리는 고귀한 순국선열
적지로 나아갔던 육이오 참전용사
이러한 정신받아서 전세계로 나가리
대한의 뿌리는 당당한 자주정신
반대를 이겨냈던 세종의 한글창제
이러한 정신받아서 전세계로 나가리
대한의 뿌리는 고결한 문화의 힘
전세계로 뻗어가는 우리의 전통문화
이러한 자랑스러운 나의조국 지키리
이정환 심사위원장은 채러티크리스천중학교 2학년 서준혁(14)군의 시조를 “스케일이 크다. 대장부의 기개와 나라사랑이 밀도있게 담겼다”고 높이 평가했다. 서 군은 “초등학생 때부터 역사를 좋아했다. 뿌리라는 시제를 듣자마자 우리 민족과 조상부터 떠올랐다”면서 “평소 애국심이 있는 편인데 대장부까진 잘 모르겠다”고 웃었다.
서 군이 웅장한 시조를 위해 가장 공을 들여 쓴 부분은 마지막 일곱 글자 ‘나의조국 지키리’다. “종장에서 애국심이 차오르게 마무리를 하고 싶어서 고민이 깊었다. 도대체 어떻게 써야 할 지 몰라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는 “시조 형식을 삼일 전에 겨우 배웠다. 아직도 완벽한 이해는 하지 못한 상태”라고 덧붙였다.
그래서 이번 대상 수상은 자신에게 당혹스러운 사건이란다. 그는 “시 독해를 항상 어려워했고, 글쓰기에 재능이 있다는 말도 들어본 적 없었다. 지난해 학교 선배가 대상을 받아 부러워하긴 했는데, 내가 그 주인공이 될 줄은 몰랐다”고 밝혔다.
‘앞으로도 시조를 계속 쓰겠냐’는 질문에는 “내가 어떤 것을 잘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대상을 받아 다른 대회도 도전해 볼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고등부 대상 장민석(중원고2)
밤
윤슬도 숨죽인 채 감색바다 일렁이면
장홧발 기대놓은 방어잡이 배 향하고
아버지 뱃방귀 울려 모슬포 항구 깨운다
밤새우는 전등 불 의지한 채 손낚시
줄당겨 생어잡으랴 베이는 손과 팔
장갑낀 손 껍데기가 떨어지는 고통을
번덕이는 비늘로 무거워진 배만큼
그믐달 닮은 허리 상처난 몸을 끌어
노란 해 수평선 위로 걸치고서야 밟은 지면
팔토시 찬 채로 잠든 모습에 까치발
머리 맡 새 장화상자 두고서 두손모아
아버지 다음 밤에는 둥근 달을 품기를
‘밤’이라는 시제에 중원고등학교 2학년 장민석(17)군은 얼마 전 봤던 제주 모슬포항의 방어잡이 영상을 떠올리고 생동감있게 현장을 묘사했다. 출항하는 배의 모습부터 어부의 노고까지 알차게 풀어냈다. 심사위원들은 “잘 짜인 서사구조 안에 치밀하게 삶의 의미를 담았다. 고등학생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라고 감탄했다.
장 군은 “평소 시를 써오다가 시조는 이번 백일장을 통해 처음 접했다. 글자 수를 맞춰 쓴다는 것에 어려움이 있어 대상은 예상하지 못했다”고 놀랐다. 대회를 준비하면서 쓴 시도 5~6편에 불과하단다. 그는 “학원에서 배우긴 했지만 개인적으로도 시조 한 편마다 시간과 정성을 많이 들여서 연습했다. 처음 글쓰기를 접했을 땐 흥미가 별로 없었는데, 갈수록 그 마음이 깊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글쓰기와 함께 그림에도 취미가 있다는 장 군은 예술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 장 군은 “당장은 대학보다는 다양한 예술을 경험하고 도전해보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다.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게 되고 대상까지 수상하다니, 앞날이 어떻게 흘러갈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암송경연 대상 서유현 (진주 주약초4)
진주 주약초등학교 4학년 서유현(10)양은 외할아버지인 최영효 시인에게 시조를 배웠다. 서 양은 "4월 암송경연대회 공고가 뜨자마자 시조 50개를 외우기 시작했고 한 달 전부터는 가족들과 매일 실전처럼 리허설했다. 엄마, 큰이모, 사촌 등 온 가족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시조 한 편을 암송하기 위해 연달아 60번 낭송한 적도 있단다.
서 양은 지난해 암송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고 올해 절치부심 끝에 대상을 손에 쥐었다. 워낙 연습을 오래 한 덕분에 "무대 위에서도 크게 떨리지 않았다"고 했다. "지난해 같은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던 언니(서가현 양)에게 자랑할 것이 생겨 기쁘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우수지도자상 채의정
문인협회 소속 작가로 여수의 공부방에서 아이들에게 시를 가르치는 채의정(61)씨는 올해 21명의 학생과 함께 백일장에 참여했다. 채씨는 1993년 데뷔한 등단 시인이자 동요 작사가다. 그는 "시조의 규칙을 어려워했던 아이들이 점점 창작에 몰두하는 모습을 볼 때 보람차다"고 했다. 그에게 시조는 "모든 운문의 기틀이 되는 장르"다.
"정형시는 처음에는 어렵지만, 글자 수에 맞춰 사고하는 과정에서 집중력과 어휘력을 키울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라며 "시조 같은 정형시를 배우면 동시나 자유시, 산문은 훨씬 수월하게 배울 수 있다. 그래서 꼭 시조를 먼저 가르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고시조를 좋아하는데, "운문의 특징인 함축미를 가르치는데 고시조만한 것이 없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심사평
◇초등부=대부분 학생은 주어진 시제를 대체로 율격에 맞춰 리듬감을 잘 표현했다. 그중 박세명은 '사랑이란 주머니 같았다' 등 비유적 표현이 놀라웠다. 따뜻한 정서가 흐르는 시적 표현에 높은 점수를 줬다. 시조의 기본 형식인 종장의 글자 수를 지키지 못한 몇 편의 작품이 아쉽다. 심사위원 김진희·이남순
◇중등부=대상 수상작인 서준혁의 '뿌리'는 중학교 2학년 학생의 목소리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웅대하고 탄탄했다. 기발한 연결 고리와 완숙한 종장 처리에서도 참신함이 돋보였다. 최우수상 최유현도 소나기를 통해 자아를 드러내는 시적 역량이 뛰어났다. 참가한 중학생들의 고른 수준을 살펴보면서 시조의 미래에 희망을 갖게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심사위원 김강호·이승현·정용국
◇고등부=대상 수상작 선정에 고심이 깊었다. 장민석은 시조를 창작하는 바탕이 탄탄하고 작품세계가 명징했다. 적확한 표현에서는 언어를 운용하는 기량이 느껴졌다. 삶의 현장에서 가슴 찡한 에너지와 애환을 그려낸 수작이다. 다소 무거운 소재감이 느껴지는 '밤'과 '벽'을 정성껏 전개한 학생들의 노고에 큰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이숙경·조영자
전체 수상자 명단
◇초등부
▶대상
박세명(여수 좌영초)
▶최우수
조수현(해솔초)
▶우수
강혜원(남한강초) 김민서(운천초)
▶장려
한단(여수웅천초) 이성표(영덕초) 김하나(서울염리초) 이진표(영덕초)
김정민(충주남산초) 강지후(여수여도초) 이정우(채러티크리사천)
김온유(여수웅천초) 김지온(여수웅천초) 김민주(본원초)
◇중등부
▶대상
서준혁(채러티크리스천중)
▶최우수
최유현(남대문중)
▶우수
엄수정(지도중) 김예찬(방배중)
▶장려
강보민(금오중) 김범수(충일중) 김민서(반월중) 김정하(지도중) 김주현(신도중)
백온유(송악중) 서연우(지도중) 양세영(태안여중) 장은유(태안여중) 정혜민(예송중)
◇고등부
▶대상
장민석(중원고)
▶최우수
한정윤(충주예성고)
▶우수
박수연(정명여고) 김한글(금호중앙여고)
▶장려
임서윤(부산동여고) 안현태(병점고) 정지훈(대전도안고) 손정윤(안산강서고) 오연준(상계고)
김혜령(대광여고) 신서연(조선대여고) 이재희(수원영덕고) 강수민(대지고) 이지민(송곡여고)
◇암송경연대회
▶대상
서유현(진주 주약초)
▶최우수
김지명(진주 주약초)
▶우수
권민기(대구 포산중)
▶장려
김나연(함현초)
◇우수지도자상 채의정
◇우수학교상 방배중학교
홍지유·황지영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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