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에 박제된 천재, 46년 만에 유고시집으로 돌아온 시인
1978년 봄, 서울 고려대 인문학부에 갓 입학한 청년은 엄혹한 시대에 목마른 영혼의 노래를 빈 원고지에 채워갔다. ‘독백체’ 연작에선 봄날 모든 물상이 새롭게 옷을 갈아입는 날, 자신은 토요일 오후 네 시 희망처럼 피는 꽃과 평화처럼 살랑이는 바람의 안부에도 심심하다고 고백했다. 사랑하는 사람 ‘순’이에게 들려주는 ‘독백체 7’에선 ‘어떤 코뮤니스트의 깃발보다도 더욱더욱 붉게’ ‘활활 타며 날아가는 새’ ‘불같이 붉은 새’가 되고 싶다고 썼다.
그러나 불새처럼 비상하기도 전에 스무살 청년은 그해 11월 경기도 대성리 북한강에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독백체 7’은 그의 유작이 되고 말았다. “불을 안고 산 이 미완의 천재”(노혜경 시인)가 남긴 시들은 이듬해 유고문집으로 나왔지만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이후 반세기 가까이 잊혔던 ‘요절 시인’ 남정국(1958~1978)이 최근 유고시집 『불을 느낀다』(엠엔북스)로 46년 만에 되돌아왔다. 두살 터울 누나 남인복 ‘문학뉴스’ 편집인이 그의 시 27편과 일기, 초고와 메모 등을 묶어 너무 일찍 가버린 천재를 추모했다.
불을 느낀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마침내 가슴으로 쳐들어가는
결심하는 자의 망설임
그의 광기(狂氣)를 듣는다.
〈불을 느낀다〉 전문
남정국의 시를 분석한 백학기 시인은 “시편들을 하나하나 넘길 때마다 갓 스무 살이 채 안 된 시인이 이러한 시어와 울림을 빚어내고 구사할 수 있을까 찬탄이 흘러나온다”고 했다. 여고 시절 그를 통해 랭보와 김수영을 알게 됐다는 노혜경 시인은 “질풍노도 시대를 함께 헤쳐오던 도중에 사라져 버린 그를 46년의 시간 뒤에 다시 만난다”라며 미완의 천재를 안타까워했다.
시집에는 일부 중·고교 시절에 쓴 시편들도 있다. 1974년부터 1976년까지 쓴 6편 가운데 ‘사랑 타령’(1975)은 그의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산문 형식을 취한다. ‘철들 때부터 나는 무던히도 사랑을 투정해왔는데’로 시작하는‘사랑 타령’은 다소 관념적인 표현과 구조 속에서 조숙한 시어 사용이 돋보인다. 시 뒤에 이어지는 초고와 메모에선 “모름지기 현대의 문학은 인간의 소외에 대하여 쓰지 않으면 안된다”며 각오와 구상을 담기도 했다.
너무 일찍 “박제가 돼버린 천재”(이재욱 문학뉴스 대표)를 반세기만에 톺아보는 행사도 열린다. 7월2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지하 1층 서클홀에서 열리는 ‘46년 만에 돌아온 스물의 시인 남정국 불을 느낀다’는 김미옥 문예평론가 사회로 진행되며 바리톤 안희동과 뮤지컬배우 나정윤의 노래가 곁들여진다.
“더럽고 지저분한 이 땅덩어리 위에서 어렵고 어렵게 살아온 너와 나의 노고를 위해 어떻든 한 번쯤은 사랑해 보렴.”
(시집 64쪽)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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