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 남자와 동거, 남편의 폭행…"사랑 깊었다" 지독한 이 부부
■ 추천!더중플: 더, 스토리 - 백년의 사랑
「 오늘의 '추천! 더중플'은 김수영 시인의 아내, 김현경 여사가 들려주는 '더, 스토리- 백년의 사랑'(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216)입니다. 일제시대에 태어나 전쟁을 온 몸으로 겪어야 했던 시인과 그 아내의 이색적인 사랑 이야기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더중앙플러스 구독 후 보실 수 있습니다.
」
술에 취한 중년의 사내가 서울 마포구 구수동 언덕길을 비틀거리며 걸었다. 버스 두 대가 엇갈려 다가왔다. 언덕을 넘던 버스 기사는 반대편 버스가 올려 쏘는 헤드라이트 불빛에 눈이 부셔 행인을 보지 못했다. 육중한 버스는 그대로 사내의 뒤통수를 쳤다. 검붉은 피가 쏟아졌다. 풀은 누웠다가도 다시 일어나지만, ‘풀이 눕는다’를 쓴 시인은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반백 년도 못 채우고 떠난 김수영 시인의 최후였다.
그가 산 시간보다 죽은 뒤의 시간이 더 많이 흘렀다. 김수영이 시에서 ‘여편네’라 멸칭하고 때론 ‘아내·처’라 썼던 뮤즈, 1927년생 김현경 여사는 이제 백수(白()壽())를 바라본다. 경기도 용인시의 한 아파트에서 여전히 김수영 시인의 기억을 안고 홀로 산다.
“나를 인터뷰하러 오신다길래 내가 김수영 시인 여편네라는 건 아실 텐데, 우리 나이로 98세라는 것도 알고 오시는 건가? 다시 전화해서 내 나이를 알려드려야 하나 하고 생각했어요. 찾아와줘서 고마워요.”
그는 최근 1년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앓느라 체중이 10㎏은 빠졌다고 했다. 3주 전 바지를 갈아입다 넘어져 갈비뼈와 척추에도 금이 갔다고 한다. 여전히 통증이 있다면서도 지팡이 없이 걸어 나와 손님을 맞았고, 의자에 꼿꼿이 앉아 응대했다. 보청기를 양쪽에 끼고 있었으나 눈빛은 형형했다.
그에게 사랑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100년의 사랑 이야기를.
"우리 김 시인하고의 사랑은 좀 이색적이지. 그 양반이 정말 깊은 사랑을 한 것 같아요."
그러나 이야기는 서로 다른 각자의 첫사랑에서 시작됐다.
김수영이 첫사랑에게 버림받고 방황하던 1942년 일본 유학 시절, 10대 소녀 김현경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김수영과 동숙하던 이종구가 ‘사랑하는 조카딸’이라며 예뻐하던 김현경을 소개해줬다. 이후 김현경은 이종구와 김수영을 모두 '아저씨'라 불렀다. 세 사람은 국경을 넘어 편지를 주고받으며 문학을 논하는 문학 동지였다. 그땐 김수영을 이성이라 여기지 않았다.
김현경의 첫사랑은 이화여대 재학시절 만난 배인철 시인이다. 배인철은 "아름다움은 모든 것에 앞선다"고 말하던 멋쟁이 휴머니스트였다. 1947년, 데이트 도중 세 발의 총성이 울린다. 머리에 총을 맞은 배인철은 그 자리에서 숨졌다. 배인철은 남로당이었다. 우익의 테러라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경찰은 치정으로 몰고 갔다. 김현경 주변에서 함께 문학 하던 남자들이 죄다 경찰서에 끌려가 문초를 당했다. 김수영도 그중 하나였다.
"그때는 연애하는 게, 사랑이 범죄예요. 신문에도 대서특필되고, 대학도 그만 다니게 됐지. 풍기문란죄로."
[백년의 사랑] ① “탕탕탕!” 첫사랑은 즉사했다…98세 김수영 아내의 회고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4622
모두가 김현경을 피했다. 그때 김수영이 가장 먼저 찾아와 "문학 하자"고 말한다. 문학이 사랑이자 구원이었던 두 사람은 관습을 뛰어넘어 동거하고, 결혼한다. 그러나 임신한 아내를 둔 채 김수영은 북에 의용군으로 끌려간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가까스로 탈출하지만, 서울에 발을 딛자마자 포로로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한다. 포로수용소의 포로들은 친공과 반공으로 나뉘어 바깥보다 더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다. 언제 차례가 올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김수영은 생니를 뽑으며 버틴다.
[백년의 사랑] ② 속옷 벗고 한강 뛰어든 여대생…김수영 “아방가르드한 여자”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6141
2년 3개월간의 포로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마침내 풀려난 김수영은 일자리를 찾아 피란 수도 부산으로 내려간다. 뒤따라간 김현경 역시 일자리를 청탁하러 이종구를 찾아갔다가 그 집에 머물게 된다. 이종구는 김현경이 아들을 맡겨둔 친정집에 생활비를 대주며 붙들어둔다. 6개월 뒤 김수영 시인이 찾아오지만, 김현경은 “먼저 가세요”라며 돌려보낸다. 이종구 몰래 빠져나온 김현경은 1955년 봄, 마침내 김수영에게 만나자는 엽서를 쓴다. 약속장소에 나온 김수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날부로 김현경과 부부의 연을 다시 이어간다.
[백년의 사랑] ③ ‘너는 억만 개의 모욕이다’…절친과 동거한 아내에 쓴 시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7754
잊고 있던 감정이 솟구친 건 의외의 시간과 공간에서였다. 이탈리아의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영화 '길(La Strada)'을 보고 한껏 감동에 젖어 나오던 길, 김수영은 거리에서 아내를 때린다. 그 에피소드가 반영된 시가 '죄와 벌'이다. 김수영이 절친과 동거한 아내에게 단 한마디도 추궁하지 않았듯, 김현경 역시 그날의 사건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서서히 안정을 찾으며 전쟁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김수영은 버스 사고로 아까운 생을 마감한다. 죽기 20일 전에 쓴 ‘풀’은 그의 유작이자 대표작이 됐다.
[백년의 사랑] ④ ‘아내 패고 버린 우산 아깝다’…시인 스스로 고백한 죄와 벌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9490
"김 시인은 사랑한다는 말은 안 했지만 깊은 사랑을 했어요. 늘 사랑이 있고요. 사랑은 받는 게 아니고 주는 거거든. 모든 것을 사랑으로 보면 다 아름답고, 또 세상이 이렇게 좋아지지. 그런데 이 좋은 세상을 못 보고 가셨네."
■ 더, 스토리 - 백년의 사랑 연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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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사랑] ① “탕탕탕!” 첫사랑은 즉사했다…98세 김수영 아내의 회고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4622
[백년의 사랑] ② 속옷 벗고 한강 뛰어든 여대생…김수영 “아방가르드한 여자”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6141
[백년의 사랑] ③ ‘너는 억만 개의 모욕이다’…절친과 동거한 아내에 쓴 시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7754
[백년의 사랑] ④ ‘아내 패고 버린 우산 아깝다’…시인 스스로 고백한 죄와 벌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9490
[백년의 사랑] ⑤ 김수영이 숨겼던 ‘性’이란 시, 아내는 치욕 참고 발표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61197
」
이경희 기자 dungl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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