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럭 멈추시오!", 학살 막은 국회의원이 있었다 [박만순의 기억전쟁2]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장천수(가명)는 지서로 가면서 투덜댔다. "요즘같이 바빠 죽을 때 왜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거여!" '부지깽이도 못줄을 잡는다'는 농번기에 소집을 당해 왕짜증이었지만 누구의 명령이라고 거부하겠는가.
툭하면 지서에서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해 제식훈련이니 반공교육을 시켰는데, 거기에 참석하지 않으면 몰매를 맞고 한동안 경찰에게 시달렸다.
얼마 전 난리가 났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장천수는 '남의 나라 얘기' 쯤으로 치부하고 지서에 갔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군남면 내 보도연맹원들이 전부 와 지서 마당 안팎이 발 디딜 틈도 없었다.
▲ 군남면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된 검덕산. |
ⓒ 박만순 |
경찰들은 그날따라 교육이고 뭐고 없이 보도연맹원들을 유치장에 구금했다. 그렇지만 지서 유치장에는 10여 명밖에 들어가지 못하고 나머지는 창고에 갇히게 됐다. 약 30명의 군남면 보도연맹원들이 콩나물시루처럼 유치장과 창고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장천수가 창고 안으로 들어가니 같은 마을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작은아버지 장환(가명)도 있었다. "작은아버지 계셨어라우" "잉" 짧게 대답한 장환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자기야 그렇다 치더라도 형님이 소장사를 해서 돈을 좀 벌고, 조카도 마을에서 청년지도자로 이름을 날릴 때였는데 저승사자 앞에 선 꼴이 됐으니 말이다.
장환은 '이러다가 장씨 집안에 큰 사달이 나겠다'는 생각에 평소 알고 지내던 영광군 국회의원 정헌조에게 구조요청을 보냈다. 정헌조의 특명(?)을 받은 이가 장환을 면회한다고 꾸며, 창고에서 사무실을 오가는 사이에 장환은 화장실을 통해 탈출했다.
그는 바로 집으로 가면 다시 잡힐 게 뻔해서 한 달가량 전북지역을 돌아다녔다. 그러자 지서 유치장과 창고의 경계는 한층 강화됐다. 결국 장천수는 지서 가까이에 소재한 군남면 양덕리 검덕산에서 1950년 7월 11일 이승의 삶을 다해야 했다.
군남면 백양리 갈마마을에서는 마을 청년들이 검덕산에서 경찰에게 학살당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발만 동동 굴렀다. 그도 그럴 것이 검덕산 학살 현장에 경찰이 총을 들고 유족들의 접근을 제지했던 것이다. 사건 발생 4일째가 돼서야 경찰들은 철수했고, 그제야 가족들이 현장을 찾았다.
"아이구야" 장천수의 아내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파리떼가 원자폭탄이 터진 후의 버섯구름처럼 근처 산을 메웠고, 시신들은 상당 부분 부패해 있었다. 결국 집 나갈 때 입었던 옷을 보고서야 남편과 자식, 동생을 찾을 수 있었던 갈마마을 주민들은 준비해간 손수레에 가족의 시신을 실었다.
▲ 2대, 6대 국회의원을 지낸 고 정헌조 의원(영광신문 제공). |
ⓒ 영광신문 제공 |
함평군과 이웃해 있는 전남 영광군 군남면은 한국전쟁기에 온갖 시달림을 당해야 했다. 인근에 설매산, 군유산, 삼각산 등이 여순사건 이후 빨치산들의 활동무대로 이용됐다. 그로 인해 경찰의 토벌 작전도 빈번했고, 군남면 주민들은 빨치산들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지속적인 감시를 받았다.
군남면 용암리 주민들도 마찬가지로 빨치산과 경찰 양쪽으로부터 시달렸고, 전쟁 직전에는 일부 청년들이 '빨치산을 도왔다는 혐의'로 국민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됐다.
배아무개(당시 19세)는 6.25가 터진 후 얼마 안 돼 지서의 호출을 받았다. 평소 한 달에 한 번꼴로 있던 소집인 줄 알았던 그는 아무런 의심 없이 외출 준비를 했다. 그는 어머니가 만들어 준 하얀 새 모시옷을 입고 입을 헤벌쭉했다. 옷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립문을 나서는 오빠의 뒷모습을 바라본 여동생 배설자(가명, 당시 9세)도 "오빠 잘 갔다 와"라며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지서로 향했던 배아무개는 유치장에서 3~4일간 구금됐다가 잠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하룻밤을 잔 배아무개는 집을 다시 나섰다. 여동생 설자의 "오빠 어디 가?"라는 물음에 오빠 배아무개가 "다시 지서로 가야 돼"라며 사립문을 나섰다.
배아무개는 군남지서에 구금돼 있던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영광경찰서로 이송됐고, 트럭에 실려 군남면 양덕리 검덕산에서 영광경찰서 경찰들에게 1950년 7월 11일경 총살됐다.
배아무개가 영광경찰서 유치장에서 끌려 나갈 때 유치장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같은 마을 사람 조아무개는 가슴을 졸여야 했다. '다음 차례는 우리구나'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배아무개가 끌려 나간 후 몇 시간 후에 조아무개를 포함한 군남면 용암리 사람 4명이 호명됐고, 다른 마을 사람까지 포함해 약 30명의 보도연맹원들이 경찰서 마당에 집결됐다.
뒷결박 당한 이들이 트럭에 실렸고, 트럭이 '붕붕' 하며 몇 차례 공회전을 하더니 경찰서 정문을 통과할 때였다. "잠깐만" 하며 트럭을 막아선 이가 있었다. 트럭 조수석에 탄 경찰이 "뭐야 이 XX야"라며 호통을 쳤다. 하지만 트럭을 막아선 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몇 차례 경적을 울려도 꼼짝을 하지 않자 화가 잔뜩 난 경찰이 씩씩거리며 트럭에서 내렸다. 불청객의 뺨따귀를 때리려는 순간 상대방의 가슴에서 황금빛이 번쩍였다. 불청객인 줄 알았는데 영광군 국회의원 정헌조(1919~1985)였다.
"의원님 어쩐 일이십니까?"
"당장 시동 꺼요!"
당황해하는 경찰에게 국회의원 정헌조는 "보도연맹원이 무슨 죄가 있다고 죽이려 하오!"라며 언성을 높였다. 그는 바로 영광경찰서장과 담판을 벌였다. 그렇게 해서 그 시간부로 영광경찰서의 '피의 제전'은 멈췄다. 트럭에 실렸던 군남면 용암리 청년 4명이 마을로 돌아갔다.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돼 있던 이들도 그 시간부로 풀려났다. '영광군의 쉰들러'가 탄생한 순간이었다(진실화해위원회, <전남 영광 국민보도연맹 및 예비검속 사건>, 2023).
▲ 영광군 학살지도 영광군 보도연맹원들이 구금된 영광경찰서와 학살된 장소가 그려진 지도. |
ⓒ 진실화해위원회 |
"국민보도연맹은 중앙과 지방을 통하여 조직을 충실히 하고 공비군별(토벌)에 큰 성과를 거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간에는 무근한 낭설이 유포되고 있어..."
전남국민보도연맹 지도위원장 김영천은 항간에 유언비어가 떠돈다며 1950년 3월 2일 긴급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항간에 보도연맹원을 "강제수용한다느니~ 무근한 허언이 유포되고 있는 것은 좌익분자들이 본 연맹의 사업을 방해하려 함이니, 일반은 이에 현혹치 말기를 바라며 아직 가맹치 않은 이들은 빨리 보련(보도연맹)의 따듯한 품 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바이다"라고 했다(<동아일보> 1950년 3월 6일자).
김영천 담화의 요지는 '국민보도연맹은 과거 좌익활동 전력자들을 교화시켜 대한민국 국민으로 (김일성과 남로당·북로당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얘기였다. 즉 국민보도연맹 결성의 애초 취지를 반복한 것이다.
국민보도연맹 전라남도지부가 결성된 것은 1949년 12월 13일이다. 이날 오후 1시 전남도청 회의실에서 전라남도지사, 검찰청장 외 다수의 지역 유력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라남도경찰국 사찰과장 이만흠의 사회로 연맹의 강령, 규약 등을 통과시키고 같은 날 오후 5시쯤 폐회했다.
전라남도 내 각 군 단위 보도연맹 결성은 1950년 들어서이고 영광군 역시 마찬가지이다. 영광군의 경우 1948년 10월 여순사건 뒤 일부 좌익인사들이 불갑산을 근거지로 활동했다. 경찰과 토벌대가 이들을 토벌할 때 주민 중 일부가 좌익활동을 하던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 후(식사 제공 등) 자수했다가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됐다.
그렇다면 영광군 보도연맹원들은 대한민국에 충성을 서약한 후 '국민으로서 보호'를 받았는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군남면 백양리, 용암리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됐다. 물론 제2대(1950~1953) 국회의원 정헌조 덕분으로 일부 보도연맹원들이 살아났지만, 그의 적극적인 구명운동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영광군 곳곳에서는 보도연맹원 사냥이 벌어졌다.
즉 한국전쟁 전 전남국민보도연맹 지도위원장 김성천이 이야기한 말과 약속이 거짓말(허언, 虛言)이 된 것이다. 보도연맹원들을 보호해 준 것이 아니라 처형했기 때문이다.
▲ 영광군 보도연맹원 일부가 학살된 영광읍 고들재. |
ⓒ 박만순 |
영광면(현재의 영광읍) 계송리 고송마을 목수 이〇섭(당시 31세)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후, 한 달에 2번 정도 영광경찰서에 소집됐다.
한국전쟁 발발 후 영광경찰서에 소집되기 직전 가족들에게 "소를 팔아 경찰에게 주면 빠져나올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말을 했지만 결국 그의 희망 사항은 실현되지 못했다. 경찰에게 뇌물(?)을 주지 못해 돌아올 수 없는 골로 간 것이다.
이〇섭이 구금된 지 3일 만에 그의 아내와 아들이 면회를 했다. 그는 아들에게 "아들아, 나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너는 건강하게 잘 자라다오"라고 말했다. 그 말은 유언이 됐고, 그는 면회 당일인 1950년 7월 10일께 영광군 영광면 연성리 깃봉재 인근에서 경찰에 의해 총살당했다. 깃봉재에서 이씨의 시신을 수습해 고송마을 집으로 주검을 운구해 왔을 때, 시신의 오른쪽 안구가 빠져 덜렁거렸다.
그렇게 영광군 보도연맹원들은 영광면 깃봉재와 고들재, 단주리 사자등, 법성면 법성리, 군남면 검덕산 등지에서 학살됐다. 그렇다면 한국전쟁 초기에 영광군에서는 보도연맹원들이 얼마나 학살됐을까?
역사학자 박찬승은 그의 저서 <혼돈의 지역사회>에서 영광군 보도연맹원 약 300명이 경찰에 의해 학살당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명확한 수치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보도연맹 사건 희생자를 최소 100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의인
해방 후 한반도는 국가 건설을 둘러싸고 남북과 좌우간에 치열한 갈등과 투쟁을 벌였다. 특히 남한(대한민국)에서는 좌우익 간의 투쟁이 가히 전쟁에 버금가는 상황이었다.
이 싸움에 전위대 역할을 한 것이 좌익진영에서는 남로당과 민청, 민애청, 빨치산이었고 우익진영에서는 대한민청, 대동청년단, 대한청년단이 주요한 흐름이었다. 여기에 북한에서 내려온 서북청년회가 좌우 갈등에 기름을 끼얹는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익의 최선봉에 섰던 대한청년단의 일부 간부가 보도연맹원을 살려주는 의로운 행동을 했다. 그중 대표적인 이가 영광의 정헌조다. 영광군 군남면 오동리 연화마을 출신인 그는 국학대학 법과(이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를 졸업했다. 해방 이후 우익단체인 대한청년단에서 전라남도 단장을 맡기도 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그는 한국전쟁 중에 가족과 일가친척들을 지방 좌익에 의해 잃었지만, 가해자들에게 보복하지 않고 오히려 구제에 앞장섰다고 한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당선됐다. 우익의 최선봉에 섰던 그는 보도연맹원 처단이라는 반인권적 전쟁범죄에 반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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