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 물속에 잠긴 벽화 속 아이를 기다리며

박은영 2024. 7. 13.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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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보 천막 소식 74일-75일차] "모두가 견디는 시간"... 오늘도 천막농성장 불은 환하다

[박은영 기자]

 아직 물이 빠지지 않은 한두리 대교 아래
ⓒ 대전충남녹색연합
 
전국 곳곳에서 안타까운 비 피해의 소식이 들린다. 대전은 다리가 내려앉아 일대의 교통이 마비되고 준설했던 다리 아래들도 모두 물에 잠기기 일보 직전이었다. 주말부터 다시 비 소식이 있는데, 부디 무사히 잘 넘기고 피해가 잘 복구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금강 수위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있다. 한두리대교 밑 그라운드 골프장 물은 전부 빠졌지만, 흙탕물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펄이 잔뜩 쌓였다. 그라운드 골프장 어르신들도 복구 작업이 한창이다. 다시 물이 찰 수 있는데 벌써 복구해도 되겠느냐는 질문에 "노인네들이 갈 데도 없고, 놀고 있을 수도 없다"는 답변을 듣고 괜히 마음이 쓸쓸해졌다.

불어나는 강물을 피해 높은 곳으로 이동하는 곤충들을 보았다. 아침마다 의자에 잔뜩 만들어 놓은 거미집을 보면 이 친구들도 어지간히 급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의자에 앉아야 하니 말없이 툭 털어내면 어디론가 부리나케 달아난다. 농성장 주변 여기저기가 누군가의 집이고 길이라는 생각이 더 깊어지는 요즘이다.

긴 장마의 시간… 모두가 견뎌야 할 시간
 
 제방 위를 지나가는 흰뺨검둥오리들
ⓒ 이경호
 
농성장도 긴 장마의 시간을 따라 자리를 옮기고 상황을 살피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대청댐 방류가 계속되면서 아직도 한두리대교 교각 밑 벽화 속 아이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2주간 비가 더 내린다고 하니 아직은 한참 기다려야 할 것 같다. 할 수 있는 일을 도모하고 싸울 힘들을 비축하기 좋을 때다. 이 싸움도 길어질 조짐이다.

그라운드 골프장에 차오른 물에 목욕을 하는 새들, 육지로 이동하는 곤충들, 재난안전본부가 있던 곳에 올라와 쉬고 있는 오리들을 보면 이 장마의 시간을 모두가 함께 견디고 있다는 동질감마저 든다. 사람의 영역에 올라와서 쉬고 있는 강의 친구들. 그러고 보면 사람의 영역, 야생동물의 영역은 구분할 것이 없다. 모두가 우리의 땅이다.

비가 잠시 소강되면 교각 밑에 킥보드를 타고, 테니스를 치고, 자전거 연습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낯선 이들이 의자와 텐트를 치고 있으니 잠시 둘러보기도 하고 점심시간에 산책하러 온 이들은 캠핑 의자에 잠시 앉아도 되는지 묻기도 한다. 잠시 그렇게 쉰 뒤, 고맙다고 말하며 돌아간다. 새롭게 경험하는 농성장의 일상이다. 장마가 세종시민들과의 거리를 좁혔다. 

하천 주변 시설물은 예산 낭비… 해마다 확인하지만
 
▲ 뻘이 쌓인 재난안전본부 자리 물이 빠지고 뻘이 쌓여있다
ⓒ 대전충남녹색연합
 
잠겨버린 그라운드 골프장과 야구장은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물에 잠겨 수리조차 못 하고 올해 말 전체 수리 및 리모델링 착공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올해 말에 수리를 한 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매년 홍수는 이런 규모로 이곳을 덮칠 것인데 그때마다 또 세금을 들여 고쳐댄다면 예산 낭비가 분명하다. 차라리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홍수터로 비워두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대전 갑천에는 하천 둔치에 158억을 들여 어린이 전용 풀 및 편의시설을 만든다고 해서 대전 시민사회가 반대하고 있다. 하천 둔치 시설물은 강우에 피해를 볼 수밖에 없고 하천 생태계에 피해를 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금강유역환경청은 하천점용 허가에 결격 사유가 없다는 이유로 물놀이장 하천 점용을 허가한다는 입장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물놀이장 예정 부지는 이번 큰비에 완전히 침수됐고, 물이 빠진 후에는 펄로 가득했다. 여기에 물놀이장을 허가한다는 금강유역환경청은 '전형적인 재정낭비 사업'에 일조하게 될 것이다. 금산 파크골프장을 21억 들여 확장하고 이번 비에 모조리 쓸려 내려간 뉴스를 아마 다들 기가 막힌 마음으로 접했을 것이다. (관련 기사 : 빗물에 떠내려간 혈세 21억, 금산 파크골프장 미스터리 https://omn.kr/29eg4)

하천 주변 시설물은 기후위기 시대에 예산 낭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해마다 확인하지만 돈에 눈이 먼 지자체들은 하천 주변에 자신의 업적을 쌓으려고 애쓴다. 자연을 정치의 제물로 삼으려는 자들은 결국 쓴맛을 보게 될 것이 바로 금산의 사례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 천막의 밤이 흐르고 있다 천막농성장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 임도훈
 
"엄마, 천막을 우리 집 앞에 치면 안 되나?"

천막이 강물에 잠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둘째가 베란다 밖을 가리키며 저기에 치면 안 되냐고 묻는다. 그러나 자기도 배시시 웃으며 "아, 저긴 세종보가 없지. 어쩔 수 없네" 하고는 비 오는 창밖을 바라본다. 비가 너무 많이 온다고 걱정하는 아이의 모습이 사랑스럽다.

세종시민들이 모인 채팅방에서 '천막농성장이 길어질 것이 걱정'이라는 우려의 글이 올라오고 있다. 또 "우리도 시간을 더 내서 야간농성, 낮 농성에 함께 하자"는 제안도 있다. 자간에 묻어나는 걱정과 사랑에 피곤할 수가 없다. 얼른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 다시 걱정하는 이들 곁에서 싸울 준비를 해야겠다.

모기약이며, 영양제를 챙겨 농성장으로 오는 발걸음들이 장마를 거뜬하게 이길 힘이고 자양강장제다. 우리는 지칠 수가 없다. 흐르는 금강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고 우리의 동지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오늘 밤도 천막농성장의 불은 환하게 켜졌다. 

물 빠진 그라운드 골프장을 터벅터벅 걸어가서 벽화가 그려졌던 교각을 한번 살펴봤다. 아직도 뛸 듯이 기뻐하며 두 손을 번쩍 들고 방문객들을 맞이하던 아이가 물속에서 나오지 못했다.

장맛비는 잠시 소강상태이지만, 대청호 방류가 계속돼서인 듯싶다. 1~2주 뒤에야 활짝 웃는 맑은 미소를 다시 볼 듯하다. 세종보가 닫힌다면 완전히 수장되는 곳, 하지만 우리가 뭇 생명들과 함께 이곳에서 버티면서 아이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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