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터에 한복 입고 갔다가 봉변 당한 이유

김경준 2024. 7. 13.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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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 배웁니다 15] "활터에서 긴 치마는 안 된다?" 근본 없는 규정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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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사극을 보며 품었던 활쏘기에 대한 로망을 30대가 되어 이뤘습니다. 대학원생으로 살면서 활쏘기를 통해 많은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보다 많은 분들이 활쏘기의 매력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으로, 활을 배우며 얻은 소중한 경험들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기자말>

[김경준 기자]

최근 지인으로부터 황당한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활터에 한복을 입고 갔다가 "활터에는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라는 지적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무예인 활쏘기를 연마하는 활터(국궁장)에서, 한복 착용이 부적절하다니. 선뜻 믿기 어려운 얘기였다.

나 역시 종종 한복을 입고 '활터 기행'을 다니곤 한다. 개인적 경험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한복 입고 활터에 오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대부분 "옷이 참 멋있다", "그 옷은 어디서 살 수 있느냐"며 애정 어린 관심을 보여줬다. 우리 전통활쏘기를 하는데 한복이야말로 가장 잘 어울리는 복장이라는 칭찬과 함께.
 
 활터에서 전통 한복을 입은 기자의 모습 (서울 공항정)
ⓒ 김경준
"긴 치마는 안 된다?" 근본 없는 이상한 규정

평소 활터에 한복을 입고 다니는 몇몇 지인들에게 물어본 뒤에야,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바로 '치마' 형태로 된 전통 여성 한복이 문제가 됐던 것이었다.

복장 규정은 활터마다 다르지만 다소 엄격한 편이다. 일반적으로 반바지와 슬리퍼(샌들 포함) 금지는 모든 활터가 공통적이다. 살을 드러내는 짧은 치마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간혹 '긴 치마'도 금지하는 활터가 있다고 들었다. 그러다 보니 불똥이 한복에까지 튄 것이다.

실제로 지인 중 한 명은 다른 활터에 방문할 때마다 한복을 입을지 말지 늘 고민한다고 한다. 방문하려는 활터의 규정이 어떤지 모르는 탓에, 괜히 입고 갔다가 봉변을 당할 우려가 있는 탓이다.

'긴 치마를 입으면 안 된다'는 규정이 언제 어디서부터 비롯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근본 없는 규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장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당시 활쏘기 사진들을 한 번 찾아보라. 과거 여성들은 치맛자락 펄럭이는 한복을 입고 활쏘기를 즐겼다. 그러니 이런 규정은 무지의 소치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일제강점기 당시 긴 치마로 된 한복을 입고 활을 쏘는 여궁사들의 모습. 출처는 <매일신보>(1941.1.6).
ⓒ 국립중앙도서관
 
활터에 불어오는 '한복 습사 운동'

활터에서 긴 치마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그러므로 치마 형태의 전통 한복도 안 된다는 황당무계한 인식을 깨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이를 바로 잡으려는 활터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

고무적인 건 최근 젊은층을 대상으로 '한복 습사(활쏘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서울 남산의 석호정(石虎亭)을 들 수 있다. 석호정은 매달 첫째주 일요일을 '한복의 날'로 지정했다.

한복의 날이 되면 궁사들은 전통 한복을 입고 활터에 올라와 습사를 즐긴다. 이들의 복장을 보면 갓과 도포를 제대로 갖춘 전통 복식 일색이다. 여성 궁사들 중에는 긴 치마를 입고 오는 이들도 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 정말 구한말 여궁사들이 살아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각 활터들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한복 입기 운동을 전개해나간다면, 활터에서는 긴 치마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이상한 규정도 자연스레 사장될 것이다. 한편으로 한복이라는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를 알릴 수 있는 계기도 될 것이다. 그러니 이런 바람직한 운동은 '선례(善例)'로서 다른 활터들도 보고 배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 남산의 석호정은 매달 첫째주 일요일을 '한복의 날'로 지정했다. 사진은 한복을 입은 석호정의 젊은 궁사들.
ⓒ 석호정
활쏘기대회 복장에 한복을 허하라

한복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 가지 더 제언을 하고자 한다.

현재 활쏘기대회(궁도대회)에서는 한복 착용이 불가하다. 대한궁도협회에서는 흰색 티셔츠와 흰색 바지, 흰색 운동화를 대회 복장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를 어길시 출전 자격이 박탈된다.

다음은 대한궁도협회의 대회 복장 규정이다.

제13조(복장규정) 각종 경기에 참가한 남·여선수는 필히 본 협회가 정한 복장을 착용해야 한다.

① 경기복은 흰색 상·하의를 착용하여야 하며, 상의의 경우 깃이 있는 흰색 티셔츠를 착용하여야 한다.
② 경기화는 흰색 운동화를 신어야 한다.
③ 경기복 상의에는 시·도(시·군) 소속 정을 표시하여야 한다.
 
 흰색 경기복을 입고 대회에 출전한 기자의 모습 (2023.10.28)
ⓒ 김경준
 
이러한 규정은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현재의 국궁 경기복은 정구(庭球)의 경기복에서 유래하였다. 복장에 관한 것은 1966년 7월 10일자 대한궁도협회장 김정대(金正大)의 명의로 시도지부와 각정 사두에게 보낸 공문에 나온다. 봄여름가을 복장은 정구복으로 하여 앞면에 소속 정을 뒷면에 시도를 표시하도록 하였고, 겨울복장은 회색이나 하늘색으로 하되 상의는 스웨터식으로 하였다. 모자와 운동화는 모두 흰색이다. 이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유시에 따른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청주 관덕정에 접수된 공문에 의함)." - 정진명, <활쏘기의 어제와 오늘>(2017), 213쪽.

1958년 4월 서울 황학정에서 열린 제1회 전국남녀활쏘기대회 사진을 보면 많은 선수들이 한복을 입고 있다. 여성 선수들은 모두가 긴 치마 형태의 한복을 입고 활을 쏘고 있다. 

 
 1958년 4월 18일~20일 사이에 서울 황학정에서 열린 제1회 전국남녀활쏘기대회 사진. 여성 선수들은 모두 한복을 착용하고 있다.
ⓒ 국가기록원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대회장에서 한복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흰색 티셔츠와 바지가 대체하기 시작했다. 바로 권력자의 한마디 때문이었다.

서슬 퍼런 군부독재 시절에야 어쩔 수 없었다쳐도,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나지 않았나. 지금이라도 공식 경기에서 한복 착용을 허용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제는 대회장에서 도포자락 휘날리며 활을 내는 궁사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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