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제주도 유배, 귀향길 기정진 만나

김삼웅 2024. 7. 13.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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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면암 최익현 평전 7] 노사 기정진의 학덕과 인품을 우러렀다

[김삼웅 기자]

 모덕사에 있는 면암 최익현 선생 생가는 지난 5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 신영근
 
제주도는 지금 휴양지와 힐링의 명소가 되고 있지만 20세기 초까지 최악의 유배지였다. 절해고도인 제주도 유배는 정치범 중에서 가장 심한 형벌이었다. 면암은 1873년 제주도에 위리 안치되었다. 위리안치형은 유배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에 가두는 형벌이다. 절해고도에 위리안치라는 이중의 형벌을 받은 것이다.

전라도 완도군 소안도를 거쳐 1873년 11월 10일 제주도에 끌려온 면암은 윤기복의 집에 위리안치되었다. 제주 목사 이복희가 위리를 감시하도록 지목되었다. 면암이 대원군을 탄핵함으로써 바지 임금에서 통치권이 주어진 왕의를 입은 고종이 내린 형벌이었다. 그는 여전히 사리분별력을 제대로 갖지 못한 채 세도가들에게 휘둘리는 암군이었다. 

이 시기 추사(완당) 김정희도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완당에 앞서 우암 송시열이 화북진으로 들어왔고, 완당, 뒤엔 면암 최익현이 이리로 귀양 살러 들어왔다. 화북진에는 오늘날에도 해신당(海神堂)이라는 사당과 봉수대를 연결하는 연대가 남아 있다. 옛 자취를 느낄 수 있다. 이 해신당은 완당의 제주 유배시절 말년에 제주목사로 부임해온 장인식이 세운 것으로 그 위패 글씨 또한 그가 쓴 것이다." (주석 1)

추사는 제주에서 9년을 유배생활을 했지만 면암은 3년 여 만에 해배되었다. 한라산과 백록담 등 명소를 두루 구경하고 1875년 4월 12일 제주도를 떠났다. 귀경길에 장성에 들러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을 찾아 뵈었다.

35세 연상인 노사는 사마시에 장원으로 급제하고도 강릉참봉·무장현감·사헌부 장령·사헌부 지평·동부승지·효조 참의·공조참판 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고 낙향하여 성리학자로서 연구에 몰두하며 살았다.

후인들에 의해 '조선시대 성리학의 6대가의 1인'으로 평가받는 노사는 성리학의 중심으로 이(理)를 파악함으로써 유리론자(唯理論者)로 평가받았다. "천하에 씨가 없이 생겨난 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이 여! 이 여! 그야말로 만물의 씨앗이다"라고 정의하였다.
 
▲ 채용신의 최익현 초상(1905) 털모자를 쓴 74세의 최익현, 아주 사실적으로 그려 얼글의 검버섯가지 놓치지 않았다. 보물 제1510호.
ⓒ 국립제주박물관
 

평생의 역저 <외질>에서 이와 기의 관계를 아래와 같이 비교하여 설명하였다. 

움직이거나 고요한 것은 기(氣)이고 움직이게 하고 고요하게 하는 것은 이(理)이니, 움직이게 하고 고요하게 하는 것은 그렇게 시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주석 2)

노사가 1866년 병인양요 직후에 올린 6개 조항의 시무상소는 면암에게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주요 내용이다.

1. 대외개방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국론이 통일되어야 한다.
2. 유사시에 대비하여 국내의 지세(地勢)를 상세히 파악해야 한다.
3.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여 군적(軍籍)의 효율적인 관리와 국방력이 강화되야 한다. 
4. 현명한 정책을 개진하게 하여 건설적인 정책을 수용하고 한글로 씌여진 정책도 받아들인다. 
5. 내정개혁을 착실히 수행하는 것이 외세를 막는 지름길이다.
6. 사대부의 군역 부담과 서원의 불필요한 것을 시정해야 한다. (주석 3)

노사는 부패무능한 왕조에서 관리보다 후학을 교육시키는 일을 자임하고 600여 명의 학인이 배출되어 그 가운데는 위정척사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키고, 이최신·기우만·기삼연·김용구·정재규·정의림 등이 호남지역의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면암은 노사의 집에서 며칠을 묵으면서 시국에 관해 논의하고 우의를 도탑게 쌓았다. 뒷날 노사의 저술을 정리하여 2책으로 만들었다. 그만큼 노사의 학덕과 인품을 우러렀다. 

그가 3년여 동안 제주도에 유배되고 향리 포천에서 은거 중일 때 일본에서는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이른바 정한론이 제기되었다.

"조속히 천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하고 사절을 조선에 보내어 그들의 무례를 묻고 만약 그들이 불복할 때는 죄를 알리어 그 땅을 크게 공격하고 신국의 무위(武威)는 신장시켜야 한다"고 노골적인 침략의지를 내보였다.  

그리고 조선에 왕정복고를 알리는 서계(書啓, 공식 외교문서)에 메이지 천황을 조선 국왕보다 위에 두는 '황조(皇祖)'·'황상(皇上)'·'황실(皇室)'·'봉칙(奉勅)' 등의 용어를 쓴 외교 문서를 보냈다. 마치 일본이 조선의 상국인 듯한 서계였다. 

조선 정부는 일본에 국서의 격식을 고치라고 요구했으나 적반하장 식으로 조선이 일본을 모욕했다고 분개하면서 정한론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1875년 8월 군함 윤요호를 조선에 보내 위협했다. 당시 강화도 부근은 허가 없이 외국 배가 통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강화도 초지진에서 운요호를 포격하자 운요호도 이에 대항하여 초지진을 공격했다. 운요호는 돌아가는 길에 영종도에 상륙하여 관아와 민가에 불을 지르고 30여 명의 주민을 살해했다. 일본은 운요호가 포격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구로와 기요타카를 특명 전권 대신으로 삼아 군함과 600여 명의 병력을 조선에 보내 무력으로 강화도조약을 맺었다. 이 강제 개항으로 일본인의 통상활동과 개항장에 일본인의 거주 허용, 조선 연해의 자유로운 측량 허가 등, 경제적 목적을 넘어 정치·군사면에서 일본이 거점을 마련하게 되었다. 

개항장을 중심으로 일본의 조악한 상품이 산더미같이 들어오고 쌀을 비롯 각종 농산물이 실려 나갔다. 국내에서는 흉작이 심해서 정부가 가지고 있던 곡식을 풀어 구제에 나섰으나 곧 바닥이 드러나고 양곡의 밀반출은 끊이지 않았다. 정부는 1876년 10월 전국에 방곡령을 내렸다.

주석
1> 유홍준, <김정희>, 198쪽, 학고재, 2006.
2> 홍영기, <기정진>, <변혁기의 인물과 역사>(광주·전남편), 135쪽, 사회문화원, 1997.
3> 앞의 책, 138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면암 최익현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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