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존중받는 스승, 아낌받는 제자

조효석 2024. 7. 13.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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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석 영상센터 뉴미디어팀기자


서울 강남 대치동의 고등학교. 한 남자가 학생 대신 찾아온 여자를 분한 듯 쏘아보더니 이내 경멸 가득한 말투로 쏘아붙인다. “기생충 같은 것들.” 모욕을 당한 여자는 의연한 척 교무실을 나서지만, 모멸감에 눈 밑이 파르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다. 남자는 학교, 여자는 학원에서 같은 ‘선생님’이란 직함으로 불린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졸업’의 한 장면이다.

여자를 벌레 털어내듯 쫓아낸 남자는 학교의 국어선생님이다. 그가 화난 건 교육자의 권리, 즉 교권이 무시당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대치동 학교에 온 뒤 처음 출제한 시험문제 답이 불분명하단 이유로 학생들의 항의를 받는다. 사실 그 배경에 대치동 학원가 유명 국어 강사의 문제풀이가 있다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학교 교무실까지 찾아온 학원 강사, 아니 선생님은 나이는 젊지만 대치동 학원가에서 십수년을 보낸 베테랑이다. 족집게 강의로 아이들 학교 시험 점수를 올리고, 수능까지 잘 치르도록 해 명문대에 보내는 게 최우선 과제다. 스스로를 교육자라 여기기에 분개하는 남자와 달리 그에게 교권이란 단어는 원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사치에 가깝다.

드라마는 ‘사교육 천국’ 대치동 학원가의 비정한 생리를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입시 현장에서 학교 선생님들이 마주하는 야만스러운 공교육의 현실까지 다룬다. 그 묘사란 때로 적나라해 화면을 똑바로 보기 부끄러울 정도다. 그러나 이런 장면을 통해 드라마가 말하려는 화두란 따로 있다. ‘스승’이란, 또 ‘제자’란 무엇인지 묻는 질문이다.

극이 일깨우는 건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규정하는 게 학교나 학원이란 공간이 아니란 점이다. 입시가 존재 이유인 학원이라 해도 가르치는 이와 가르침 받는 이의 관계가 반드시 천박한 건 아니며, 전인교육과 학문을 목표로 삼는 학교라 해도 둘의 관계가 항상 고결하진 않다. 사람이 사람을 가르치는 일, 즉 교육이란 애초 학교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두 주체를 스승과 제자로 만드는 건 어떤 가르침을 서로에게 주는지, 그 과정에서 서로를 얼마나 존중하며 아끼는 관계를 맺는지다. 오늘날의 공교육 현장처럼 어떤 대학을 보내는가, 나아가 아이들이 어른들의 출세 욕망을 얼만큼 대신 실현하는가가 가장 중요한 곳에서 이런 관계를 맺기란 쉽지 않다.

얼마 전 서울시의회는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했다. 서이초 사건을 비롯해 학교 선생님들을 괴롭힌 일련의 사태가 동력이었다. 장관과 대통령은 “학생의 인권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교권을 침해하는 불합리한” 조례라며 직접 목소리를 냈다. 학교 선생님 약 4분의 1이 가입한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이 조례가 교권 추락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가르치는 자가 가르침 받는 자의 인권을 침해할 수 없다’는 글이 교권을 무너뜨렸다면, 그 교권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배움의 현장을 무너뜨린 범인이란 ‘이 순간의 경쟁과 줄세우기가 너희 인생을 송두리째 결정짓는다’는 윽박과 ‘저항 못하는 약자에겐 기꺼이 폭력을 저질러도 된다’는 사회의 야만이지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고 적은 11쪽짜리 글줄이 아니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교권 추락에 관한 논의는 선생님이 학생을 어떻게 통제할지에만 집중돼 있다. 체벌이 사라진 현장에서 선생님은 벌점과 성적으로 아이들을 통제하려 애쓰지만 모든 학생에게 그런 방법이 통할 수는 없다. 애초에 가르침의 유일한 수단이 상대의 복종뿐인 학교가 우리가 지향해야 할 교육현장은 아닐 것이다.

드라마 서두에서 학원 선생님을 면박 준 학교 선생님은 곡절 끝에 학교에서 쫓겨나 그토록 경멸하던 학원가 강단에 선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이곳에서 만개한다. 학교에서 매 순간 아이들을 성적 매겨 줄세우고 복종시켜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던 그가 학원 강단에선 문학의 즐거움과 의미를 전력을 다해 가르친다. 오히려 학교에서보다 스승에 가까운 모습이다.

선생님이 학교를 벗어났다 해서 스승이 아닐 수 없듯, 선생님이 스승으로 존중받고 학생이 제자로 아낌받는 교육현장을 만드는 건 조례를 폐지하는 일 따위로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의 학교를 스승과 제자가 탄생하는 곳으로 만들고 싶다면 선생님이 어떤 걸 가르치고, 또 아이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나갈지부터 신경 써야 한다.

조효석 영상센터 뉴미디어팀기자 prome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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