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는 현명했다, 이슬람을 '국교'로 하지 않은 이유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 <20>]

김기협 2024. 7. 13.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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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누산타라(Islam Nusantara)는 인도네시아 최대의 이슬람 조직 나다툴 울라마(NU, Nahdlatul Ulama)를 중심으로 2015년에 시작된 종교운동이자 국민운동이다. 인도네시아다운 이슬람 정체성을 세우는 목적이다. (“큰바다의 섬들”이란 뜻의 ‘누산타라’는 한국인에게 ‘한반도’처럼 자기 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2002년과 2005년 발리 폭탄테러 같은 이슬람 원리주의의 확산에 대한 경각심에서 일어난 운동이다. 운동이 출범하자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앞장서서 공개적으로 지지를 표명했다. 당시 세계적인 원리주의 확산에 인도네시아가 말려들지 않게 하려는 결의였다.

2백여 명이 목숨을 잃은 2002년 10월 12일 발리 폭탄테러 현장 부근. 2005년 10월 1일에도 가까운 곳에서 또 폭탄테러가 있었지만 경찰의 기민한 대처로 피해가 훨씬 적었다.

인도네시아는 인구의 약 87%가 무슬림이지만 이슬람을 국교로 하지 않는다. 약 63%가 무슬림이면서 이슬람을 “연방 종교”로 규정하는 말레이시아에 비해 세속국가 원칙이 확고하다. 헌법 전문에 명기된 판차실라(Pancasila: 5대 원칙)가 이 원칙을 대변한다.


이슬람을 국교로 하지 않는 인도네시아


판차실라는 일본 점령군이 후원하는 인도네시아 독립준비조사위원회에서 1945년 6월 1일 수카르노가 제안한 건국강령이다. 이 강령은 곡절 끝에 약간의 수정을 거쳐 인도네시아 헌법 전문에 채용되었다. 5대 강령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유일신에 대한 믿음.
2. 공정하고 문명된 인간사회.
3. 인도네시아의 통합성.
4. 대표들의 숙의를 통한 합의로 내면적 지혜를 실현하는 민주주의.
5. 모든 인도네시아 인민을 위한 사회적 정의.

인도네시아 국가휘장을 “가루다 판차실라”라 한다. 띠에 적힌 “Bhinneka Tunggal Ika”는 “다양성 속의 통일성”이란 뜻이다.

종교에 관한 첫 강령이 특이하다. 이슬람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도 인정한다는 것인데, “유일신”의 해석도 넓게 해서, 거의 모든 신앙을 포용하는 ‘종교의 자유’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시기와 지역에 따라 이 자유에 제약이 따르기도 한다. 수마트라 북부의 아체(Aceh) 주는 지금도 이슬람 율법의 지배가 매우 강고하다.

이슬람 누산타라는 원리주의를 경계하며 인도네시아 현실에 적합한 신앙의 길을 제창한다. 반대자에게는 ‘타락’으로 보일 수 있는 길이다. (“한국적 민주주의”를 생각하라.) 이 운동의 주체인 나다툴 울라마가 최대의 종교조직이지만, 이에 반대하는 무함마디야(Muhammadiyah)도 그에 버금가는 큰 조직이다.

무함마디야(1912년 창설)도 나다툴 울라마(1926년 창설)도 모두 식민지배에 대한 대응으로 출발한 운동이다. 근대화를 적극 추구하는 ‘현대파’ 무함마디야는 이슬람의 본 모습을 되찾는 ‘정화’를 추진한 반면 ‘전통파’ 나다툴 울라마는 인도네시아에 토착화한 이슬람의 모습을 지키고자 했다. 한국 독립운동에서 기독교 계열과 천도교 계열 사이의 차이와 비슷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정착에 1천년이 걸린 인도네시아의 이슬람


세계 최대의 무슬림 인구를 가진 나라면서도 인도네시아가 이슬람을 국교로 내세우지 않은 것은 현명한 판단으로 보인다. 만약 국교의 위상을 가진다면 그 울타리를 엄격하게 세워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인도네시아에서 무슬림의 모습은 너무나 다양하다. 그 다양한 모습은 이슬람 전파 과정을 통해 빚어진 것이다.

8세기부터 무슬림 상인들이 남양 일대에서 활동한 흔적이 보이지만 지역사회에 전파가 시작된 것은 13세기 이후다. 무슬림 상인들과 접촉하는 교역 종사자들과 교역로 주변의 군주들이 이슬람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1292년에 이곳을 지나간 마르코 폴로가 무슬림 도시의 존재를 기록했고, 수마트라섬 북부의 술탄국이 기록된 1297년의 비석이 발견되었다.

남양에 처음 찾아온 무슬림 상인들은 대개 인도 서해안 사람들이었다. 교역의 증가와 교역로의 확장에 따라 페르시아, 아라비아 방면 상인들도 오게 되었다. 그런데 13세기에 이슬람의 진출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드는 데는 중국 방면의 영향도 컸을 것 같다.

당나라에(7-10세기) 서역인의 거주와 활동이 많았던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서역인 중에는 육로(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사람들이 많았지만, 동남해안에는 해로로 들어온 사람들도 많았다. 878년경 황소(黃巢)의 난 때 광저우(로 추정되는 도시 Khanfu)에서 수만 명의 외국인이 학살당했다는 아랍 측 기록이 있다.

원나라 말년 취안저우 일대의 무슬림 폭동(1357-1367)도 외국인 대학살이었다. 14세기까지 남양보다 중국 동남해안에 더 많은 무슬림이 와 있었던 것은 재닛 아부-루고드의 세계체제론에도 맞는 현상이다. 교역로보다 생산중심지의 경제활동이 더 크기 때문이다.

송-원 시대를(9-14세기) 통해 중국 동남해안에서 외국 상인의 거주와 활동은 꾸준히 늘어났다. 원-명 교체를 통해 그들의 중국 내 입지가 줄어들면서 많은 수가 남양 각지로 옮겨갔다. 끼어들 만한 빈틈이 있고 중국 시장 접근이 가능한 곳이기 때문이다. 13세기 이후 남양의 이슬람화가 활발해지는 데는 이들의 역할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해안 주민과 다른 길을 걸은 내륙 주민들


남양의 이슬람화는 장기간에 걸쳐 진행된 복잡한 과정이었다. 그 진행에 따라 무슬림-비무슬림의 경계선이 지역, 종족, 문화를 기준으로 형성되고 변화해 왔다. 그 경계선의 일부라도 면밀히 살펴보면 이슬람화 과정의 일반적 특성을 알아볼 수 있다.

해안 주민과 내륙 주민 사이의 경계선이 하나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수마트라섬 북부의 바탁족(Bataks)은 이 경계선을 특별히 잘 보여주는 사례다. 보르네오섬의 다약족(Dayaks)처럼 특이성이 너무 강한 집단과 달리 바탁족은 산업기술과 문화 수준에서 해안 주민과 큰 차이가 없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논에서 새를 쫓는 바탁족 농부.
전통 복장으로 춤을 추는 바탁족 여인들.

수마트라섬 북부는 말라카해협 어귀로 중요한 교통로에 면한 곳이다. 이슬람 전파도 남양에서 제일 빠른 곳이었다. 13세기 이후 교역이 확대되면서 지역사회의 분화가 일어나는데, 분화의 중요한 기준 하나가 이슬람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방식에 있었다.

애초에는 바탁족도 (적어도 그중 일부는) 항구를 가지고 교역활동을 벌였고, 인도 남부의 타밀족과 특별히 가까운 관계였다. 타밀족은 한때 남양 해역에서 활동이 많았으나 11세기 중엽부터 촐라제국의 쇠퇴에 따라 역할이 줄어들었다. 타밀족을 통해 힌두교를 받아들인 바탁족은 인근의 아체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세력의 성장에 밀려 내륙에 갇히게 되었다.

12세기 이후 교역활동에서 물러선 바탁족의 모습에서 내륙 주민이 처한 조건을 확인할 수 있다. 해안지대의 이슬람세력과 비슷한 문화 수준에서 출발했지만 시대 변화에 뒤지면서 ‘야만인’으로 규정되기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문제가 ‘식인’의 풍습이었다.

바탁족의 식인 풍습은 19세기까지 실재했다. (1834년에 두 명의 미국인 선교사가 희생된 일이 있다.) 상당한 문화 수준을 가진 사회의 식인 풍습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주변 세력에게 수세에 몰린 입장에서 용맹을 과시하려는 바탁족의 입장과 바탁족의 억압을 정당화하려는 주변 세력의 의도가 합쳐져 빚어진 현상으로 해석된다.


파드리전쟁은 독립전쟁이었나, 내전이었나?


또 하나 중요한 경계선이 신앙의 엄격성을 기준으로 형성되었다. 남양의 이슬람 유입은 경로가 복잡했다. 인도 방면, 페르시아-아라비아 방면, 중국 방면의 상인들이 전파 매체였고 ‘선교사’라 할 만한 율법학자는 극히 소수였다. 신앙과 수행의 기준을 통제하는 강력한 주체가 없었기 때문에 지역마다 다른 형태의 이슬람이 나타났다. 민간신앙이나 힌두교-불교와 결합하는 경향도 많았다.

엄격한 율법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남양 어느 곳에서나 큰 세력을 이루지 못하다가 18세기 이후 교통이 쉬워지는 데 따라 변화가 일어났다. 성지순례가 늘어나면서 아라비아 쪽 신앙 풍조가 들어왔다. 특히 아라비아에서 18세기에 일어난 원리주의 성향의 와하비즘(Wahhabism)이 들어와 인도네시아 현대파 형성의 배경이 되었다.

신앙의 순화(純化)를 주장하는 파드리(Padri) 세력이 자라나 종래의 신앙 행태를 아닷(adat)으로 비판하면서 긴장이 일어나고 그 결과 파드리전쟁(Padri War, 1803-1837)이 벌어졌다.

애초에 분쟁은 아직 네덜란드의 지배력이 미치지 않고 있던 수마트라섬 서부 지역에서 현지민 사이에 일어났으나 수세에 몰린 아닷 세력이 네덜란드인의 지원을 청하면서 네덜란드인과 현지민 사이의 전쟁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1824년 이후 네덜란드군의 공세가 거세지자 아닷 세력도 파드리와 힘을 합쳐 함께 저항했다.

파드리전쟁 전투 장면.

인도네시아에는 국가가 지정하는 ‘국가영웅’이 있다. 2백여 명 지정자 중 파드리전쟁 관련자는 투안쿠 이맘 본졸(1772-1864) 한 사람이다. 최후까지 버틴 파드리 지도자로서 1973년 지정되었는데, 근래 와서 이의 제기가 늘어나고 있다. 전쟁 중 바탁족과 아닷 등 다른 현지민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문제삼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은행권의 투안쿠 이맘 본졸 초상. 종교지도자로서 그의 권위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으나 민족 지도자로서 그가 생각한 ‘민족’의 범위는 논란의 대상이다.

파드리전쟁은 이슬람 정체성을 둘러싸고 인도네시아가 겪은 갈등의 한 조그만 단면일 뿐인데, 그 조그만 단면 안에서도 여러 가지 명분이 복잡하게 뒤얽힌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독립 때의 판차실라 정신도, 지금의 이슬람 누산타라 운동도 그 복잡한 경험을 바탕으로 빚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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